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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식 Sep 07. 2024

소명(召命)과 사명(使命) II

한국 교회 성도들(사역자를 포함해서)만큼 지역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전 세계에 또 있을까? 확언컨대 없다. 한국 교회 성도들처럼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의 헌금을 힘이 지나도록 하는 모습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나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마게도냐교회를 빼고는 본 적이 없다. 예배당을 건축한 교회들이라면 그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자가를 전세로 그리고 전세를 월세로 바꿔서 혹은 가지고 있던 건물이나 땅을 팔아서 헌금했다는 간증이 넘쳐난다. 작금의 성도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기 어렵다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여전히 헌신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는 이러한 한국 성도들의 사랑과 헌신이 한국 교회를 성장시켰다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헌신이 낳은 부작용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건물이나 땅을 팔아 예배당을 건축했으니 그 예배당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질까? 너무도 중요한 나머지 해당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꿈도 못 꾼다. 안수집사나 장로 혹은 권사로 임직 할 때 모두들 있는 힘껏 또 한 번 특별헌금을 한다. 그렇게 임직을 했으니 그 직분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신앙을 버리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역 교회가 새로운 세대를 담아내기 위해서 변화를 시도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그토록 헌신한 교회의 중직자들이다. 그분들이 끝까지 그 예배당을 지키려고 하고, 끝까지 그 직분을 감당하겠다고 한다. 그 결과 교회는 시대와 세대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고 그토록 헌신한 일세대 성도들과 함께 급격히 노령화되고 있다. 누군가가 내게 왜 새 교회를 시작했느냐가 물었을 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새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문제는 성도들만이 아니라 목사들에게도 나타난다.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자신의 전세금이나 전재산을 쏟아부어서 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몇 십 년을 사역하다가 은퇴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본인이 개척한 교회에서 은퇴를 하면서 은혜롭지 않게 끝을 맺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담임목사 세습, 원로목사 추대 그리고 퇴직금 정산 문제 등으로 교회가 한 바탕 홍역을 치른다. 그동안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이 생각나서 그럴 수도 있고 은퇴 후의 삶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이해하려고 노력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교회를 시험에 들게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게 하니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꼴이 될 때가 많아서 안타깝다.

   나는 이런 문제가 소명과 사명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않아서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내가 성도로 혹은 목사로 부름을 받은 것은 소명이다. 그러니 그것은 불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교회를, 얼마 동안 섬기느냐는 사명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변적이다. 문제는 이 둘을 혼동하거나 혹은 가변적인 사명을 불변적인 소명으로 굳게 믿는 데 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섬기는 사명으로 자신의 소명을 삼는다. 많은 목사들이 지역 교회를 섬기는 사명을 감당하기 때문에 자신은 소명을 따라가고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나는 오늘이라도 지금 섬기는 교회를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는 것이다. 물론 어려움을 핑계 삼아 지역 교회를 쉽게 옮기는 것은 문제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지역 교회에서 한 수고를 스스로 세어 보면서 억울함을 곱씹는다면 그것은 내가 지역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집착한 것을 반증한다. 사명을 소명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목사들 가운데 소명과 사명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는 사실이다. 지역 교회를 섬기는 사명을 감당할 때 그 일이 결코 맘처럼 그리고 기대처럼 되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일꾼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다. 목사는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 내가 충성하고 있느냐를 늘 물어야 한다. 내가 충성하고 있다면 그 사명이 때로 미숙하고 때로 미완으로 끝나더라도 나는 여전히 떳떳한 소명자인 것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지역 교회가 내 소명이나 정체성을 결정짓지 않는다. 더 나아가 내가 어떤 목사이냐를 평가할 수도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목사가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분명히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은 지역 교회를 힘써 섬기되 그 지역 교회에 함몰되지 않게 만든다. 목사인 나는 종종 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소명에 충성하고 있는가? 나는 사명에 성실한가? 무엇보다 나는 소금교회에 집착하지 않고 소금교회를 사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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