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인 아들이 11학년 때 일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온라인으로 수업을 받으며 11학년 말에 있는 보드시험(일종의 수능시험)을 준비해야 하는데 통 공부를 하지 않고 있었다. 나도 여느 아빠들처럼 며칠이고 지켜보고 지켜보다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말을 걸었다. "너는 뭐가 되고 싶니?" 이 질문은 "넌 지금 공부 안 하고 게임만 하니?" 하는 말을 좀 순화해서 물은 것이다. 그러면서 나도 다른 부모들처럼 '네가 꼭 공부를 안 해도 좋으니 네가 되고 싶은 것을 위해서 뭐든 열심히 해봐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부모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자녀들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자신이 뭐가 되고 싶은 지 모르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들은 내 질문에 "예전에 내가 아빠한테 축구국가대표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아빠가 불가능하다고 했잖아? 지금은 꿈이 없어!"라고 대답했다. 아들이 9학년 때 축구국가대표 선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매몰차게 "너는 너무 늦었다!"라고 말했었다. 아들은 그런 아빠에 대한 불만을 이때 내뱉은 것이다.
그런 아들에게 나는 아빠가 왜 그때 그렇게 말했는지를 설명해 줬다. 나는 아들에게 "네가 정말 좋아하는 게 축구니 아니면 축구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것이니?"라고 물었다. 그리고는 아들이 축구 자체를 좋아하기보다는 골을 넣고 이기고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 판단의 기준은 간단했다. 나는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축구공을 가지고 혼자 노는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경기를 하지 않을 거면 축구공을 가지고 나가지고 않았다. 게다가 아들은 축구를 하면서 늘 공격수만 했다. 수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마 수비를 하라고 하면 아예 축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나의 설명에 아들은 설득이 되는 눈치였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안 됐다. 그러면 여전히 아들이 꿈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아들에게 아들이 태어나고 지금까지 자라는 모든 과정을 지켜본 아빠로서 아들이 가진 장점 다섯 가지를 나열했다. 이 장점들이 무엇이 되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가르쳐주지는 않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한 시간가량 자신의 장점들을 아빠로부터 들은 아들은 뭔가 깨달음이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아빠인 나에게 좀 더 존경하는 태도를 가졌고, 열심히는 아니어도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무사히 11학년을 마치고 시험 성적도 나쁘지 않게 나와서 12, 13학년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내가 아들에게 말한 장점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아들이 가진 첫 번째 장점은 승부욕이다. 나는 그 근거로 아들이 일곱 살 때 태권도를 배우면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줬다. 아들은 태권도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태권도 3단인 아빠를 이기겠다고 발차기를 했다. 거의 발길질에 가까운 귀여운 발차기였다. 그런 아들의 발차기에 내가 맞춰주기보다 몇 대 발로 때려줬더니 분한 모습을 보이면서 울면서 달려들었다. 아빠한테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8학년 때 격투기 캠프를 할 때도 드러났고, 나중에는 축구 시합에서 지고 나면 분에 못 이겨 눈물을 보이는 모습에서도 드러났다. 이만큼 아들은 승부욕이 강하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큰 장점이다. 승부욕이 없는 사람은 스포츠를 할 수 없다. 혹시 승부욕이 없는 사람이 군인이 되면 전쟁에서 쉽게 포기할 것이다.
아들이 가진 두 번째 장점은 적응력이다. 여덟 살에 인도에 가서 영어도 힌디도 모른 상태에서 인도 학교를 다녔다. 처음 석 달 동안 고생을 참 많이 했다. 종종 학교가 가기 싫다는 아들에게 나는 석 달이 지나면 힌디를 잘하게 되니까 태권도 1품을 딸 때처럼 조금만 인내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나자 정말 힌디로 인도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우리 세 아이가 유일한 외국 학생인 그 학교에서 인도 선생님들 모두 아들이 힌디를 잘하는 모습에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처럼 아이가 적응력이 뛰어난 데는 눈치도 한몫한다. 눈치는 어떻게 보면 짐작하는 능력이다. 상황을 파악해서 저게 이런 뜻일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따라 하는 능력이다. 물론 이렇게 배운 것들은 쉽게 잊어버리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아들이 가진 세 번째 장점은 리더십이다. 어린이집 때부터 아들 곁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었다. 인도 학교에 다닐 때도 국제학교에 다닐 때도 친구들이 아들 주위로 늘 모여든다. 13학년을 마친 졸업 사진에 아들은 센터를 차지하고 있다. 리더십은 후천적으로 계발되기도 하지만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친구들이 있다.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주변에 친구들이 있다면 선천적인 리더십을 가졌을 확률이 높다. 내가 아들이 리더십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들이 아들을 무척 좋아하고 잘 따른다는 것이다. 아들은 여덟 살에서 열 살이나 어린 사촌 동생들은 데리고 노는 것을 참 잘한다.
아들이 가진 네 번째 장점은 친화력이다. 친화력이 좋다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잘 읽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들은 외할머니와 친구처럼 지낸다. 외할머니가 첫 손자인 아들이 무척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들이 외할머니와 어려서부터 친구처럼 지내는 법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할머니 마음을 헤아리고 외할머니를 때로 위로해 주는 아들의 모습은 사위인 내게는 없는 모습이다. 지난 1년 동안 고모네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고모와 무척 친해졌다. 말도 엄마한테 하듯이 반말을 한다. 고모랑 서른일곱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고 사촌 막내형보다 한참 어리지만 고모랑 친구처럼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아들이 가진 다섯 번째 장점은 정리 능력이다. 최근에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자기 방이 어질러진 상태 그대로 두는 때가 늘긴 했지만 아들의 방은 딸들의 방보다 늘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이것도 타고나는 것 같다. 아들이 대여섯 살 됐을 때 일이다. 방이 두 개인 집에 다섯 가족이 살 때인데 작은 방에 아이들의 책장이 있었고 책장에는 꽤 여러 권의 책들이 있었다. 어느 날 집에 들어와 보니 아들이 책장의 책들을 모두 꺼내서 바닥에 흩어놓고 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자 화가 나서 "네가 다 정리해!"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낮잠을 잠깐 자고 일어나 나가보니 작은 방의 책들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도 원래 있던 책 위치대로 그대로 꽂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네가 아빠보다 낫다!"라고 말하며 감탄했다. 무엇인가를 잘 정리한다는 것은 다만 방정리나 책정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재정을 정리하고 자료를 정리한다. 그리고 마침내 상황을 정리한다. 이것은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능력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을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느낄 때 부모를 존경하는 것 같다. 아빠로서 내가 말해준 다섯 가지 장점들은 아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가진 장점을 발견할 때마다 아이들에 대한 리스펙트(respect)가 나에게도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