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레드북> 나를 나로 말할 용기, 당신의 이야기를 써갈 시간
모든 시작에는 끌림이 있다. 나에게 뮤지컬 <레드북>은 작년, 우연히 본 유튜브 영상 하나가 그 시작이었다. 박진주 배우가 무대 위에서 ‘사랑은 마치’를 부르던 순간,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듯했다. 그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멜로디, 진리를 노래하는 듯한 가사에 마음을 온통 빼앗겨 버렸다. 언젠가 반드시 저 무대를 온전히 느끼고 말리라. 그 다짐이 드디어 현실이 되는 날, 유니버설아트센터로 향하는 발걸음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레드북>의 경험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붉은 벨벳 장식과 반짝이는 샹들리에,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는 순식간에 관객을 19세기 런던의 어느 극장으로 데려다 놓았다. 이토록 완벽한 몰입의 장을 마련해 준 공간에서, 나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갈 모든 준비를 마쳤다.
뮤지컬 <레드북>은 19세기 영국, 여성에 대한 억압과 편견이 당연시되던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숙녀는 조신하게, 신사는 용감하게’와 같은 성 역할의 틀이 견고했던 시대. 그 보수적인 시대의 한가운데서 세상은 여자를 한 개인이 아닌 '숙녀'가 되기를 강요한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아가던 '안나'는 오롯이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은 여성이다. 현실의 고단함을 ‘야한 상상’이라는 유쾌한 무기로 돌파하며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소설로 써 내려가는 안나. 그리고 오직 이성과 원칙만이 세상의 전부라 믿었던 변호사 ‘브라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통해 이해와 존중의 가치를 배워가는 과정은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한정석 작가는 안나를 ‘말하는 사람’으로, 브라운을 ‘듣는 사람’으로 설정했다고 말한다. 다수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용기 있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 그리고 그 생각을 귀담아듣고 성장하며 나아가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사람. <레드북>은 이 사소해 보이는 ‘말하기’와 ‘듣기’라는 행동이 쌓여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변화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바로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안나의 외침이다. ‘나는 야한 여자’라는, 어쩌면 민감하고 도발적인 주제를 <레드북>은 대중적인 언어와 유머,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낸다.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가 정해놓은 틀에 나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용기. <레드북>은 그 용기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를 무대 위에서 증명해 보인다.
더 나아가 <레드북>은 사랑의 본질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안겨준다. 나는 지금껏 모든 사랑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다고 작품은 말한다. 극 중 인물의 대사처럼, ‘내가 왜 수염이 자라는지, 내 몸이 왜 이런지 몰라도 나는 나를 좋아해요. 저 별이 왜 빛나는지는 몰라도 나는 저 별이 너무 아름다워요.’라는 말처럼 말이다. 모든 것에 이유를 찾으려 했던 나의 편협한 생각은 이 대사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사랑은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존재 그 자체를 긍정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레드북>을 통해 나는 진짜 사랑을 깨닫게 됐다.
앙상블의 폭발적인 성량으로 시작된 무대는 165분의 러닝타임 내내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안나’ 그 자체가 된 옥주현이 있었다. 작품을 보기 전 그의 안나는 어떨지 반신반의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옥주현은 노련한 연륜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단한 에너지로 편견에 맞서는 당당한 안나를 완벽하게 그려냈다. 나이대를 잊게 하는 사랑스러움과 무대를 쩌렁쩌렁 울리는 가창력은 왜 그가 최고의 배우인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했다.
‘브라운’ 역의 지현우 역시 인상 깊었다. 뮤지컬 경험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안정적인 노래와 단단한 연기력으로 순진하고 고지식한 신사 브라운의 성장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그의 섬세한 연기 덕분에 관객들은 브라운의 변화에 더욱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두 주연 배우뿐만 아니라, 유쾌한 카리스마로 극의 활력을 불어넣는 ‘로렐라이 언덕’ 회원들과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조연들까지, 모든 배우가 자신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며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레드북>이 순수 국내 창작 뮤지컬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솔직히 깜짝 놀랐다. 대극장 무대를 가득 채우는 라이선스 뮤지컬들 사이에서, 이토록 탄탄한 서사와 음악을 갖춘 우리 작품을 만났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위트 넘치는 대사와 유쾌한 안무는 160분 내내 지루할 틈 없이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고, 그 웃음 속에서 작가가 전하려는 묵직한 메시지는 더욱 자연스럽고 깊이 있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뮤지컬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무대 위에서 피어나는 기적 같은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앙상블과 주연 배우 모두가 터질 듯한 에너지로 황홀한 노래를 부르고 아름다운 장면을 이어간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그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온몸에 전율이 돋고 벅찬 에너지가 차오른다. 배우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에너지를 그 어떤 막도 없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 뮤지컬 입문자에게 이 작품을 강력히 추천하는 이유이다.
특히 <레드북>의 넘버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이다. 내가 가장 사랑에 빠졌던 넘버는 단연 ‘사랑은 마치’이다. 이 곡은 사랑이 영원불변하기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기에 가치 있다’는 안나의 가치관을 브라운에게 오롯이 전해준다. 어느새 그 가치관에 설득당한 브라운은, 안나를 변호하며 남자 재판관들에게 이 진리를 설파한다. ‘사랑은 마치 날씨와 같은 것’이라 노래하며 펼쳐지는 그의 변론은, 평생 권위와 원칙 속에 살아온 판사들마저 덩실덩실 춤추게 만드는 사랑의 마법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그들의 잔망스러운 몸짓은 어색해서 더 큰 웃음을 자아내지만, 이는 사랑의 진리 앞에서는 누구나 무장해제될 수 있다는 연출의 재치 있는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단연 이 뮤지컬의 주제를 관통하는 곡은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다. 재판을 앞둔 안나는 사랑이나 안정보다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레드북
위 가사에서는 어떤 상황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중심이 느껴졌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순수함만을 강요하는 이 요상한 시대에 기꺼이 ‘새까만 얼룩’으로 남아 자신을 말하겠다는 의지는 결연하기까지 하다. 옥주현의 단단한 발성과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울려 퍼지는 이 노래는 엄청난 감동과 함께 경이로움을 안겨주었다. 압도적인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의 경외감이라고 할까. 그의 이야기와 목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메울 때 그곳은 이미 다른 장소가 되어있었다. 이 넘버는 벅찬 감동을 선사하는 것을 넘어, 내 삶의 펜대를 다시 고쳐 쥐게 만드는 강렬한 동기가 되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 로비에 마련된 포토존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속이 텅 비어있는 거대한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마치 우리에게 ‘이제 이 책을 당신의 이야기로 채워나가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제2의 누군가가 아니라, 제1의 내가 되세요.”
<레드북>은 마음껏 웃다 보면 어느새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용기가 샘솟는, 유쾌하고도 강력한 힘을 지닌 작품이다.
이 작품을 쓴 한정석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안나가 살던 시대에서 한참이나 지난 지금도 우리에겐 여전히 많은 말들이 필요하다. 자신을 아끼고 지켜주는 말, 잘못을 밝히고 바로잡는 말,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 <레드북>이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들을 수 있는 여유'를 갖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작가의 말처럼, 나 자신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지금 이 시대에 <레드북>을 꼭 봐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웃음과 감동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유쾌한 여정을 통해, 우리는 '나'라는 책의 새로운 페이지를 써 내려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