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과 똑같은 928호 방에서 묵었는데, 바다는 변함이 없고 나는 한 살이라는 나이가 더 들었습니다.
유명한 맛집인 해운대 암소갈비를 먹고, 호텔 바에서 칵테일도 마십니다. 온천욕까지 마친 우리 부부는 밤 10시에 이미 잠들고, 동생네는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쉽습니다.
아침이 되고 해운대 바다에 윤슬이 뿌려집니다. 잊지 못할 이 풍경을 일 년 만에 마주하며 우리 일행은 한참 동안 침묵합니다.
아홉산숲에 들러서 대나무 숲을 걷는데, 웅장한 숲 중간에 유독 풀이 자라지 않아서 옛날부터 굿판을 벌였다는 조그마한 터를 바라보며, 각자의 마음속에도 푸른 숲 가운데에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나만의 황무지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홉산숲의 대나무
차이나타운에서 군만두를 먹고, 창비사에서 운영하는 독립서점을 방문하였습니다. 한 칸 한 칸을 메우고 있는 작가들이 대단해 보이고,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창비사가 마음 한쪽에서는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사회적으로 제법 성공한 제 동생은 생각이 더 복잡해 보입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 눈에는 책 한 권에 들어 있는 복잡 미묘한 모든 과정이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창비사에서 펼쳐놓은 책들도 그 복잡함의 결과물입니다.
오후 늦게 이동한 영도 메리어트 호텔. 바로 영도가 제가 20대 시절에 수없이 방문한 부산입니다.
가파른 언덕에 다닥다닥 붙어잇는 산동네. 그 앞에 펼쳐지는 푸른 바다와 항구. 우리 네 명은 호텔에 짐을 풀고 나와서 자갈치 시장을 향하는 택시를 탔고 기사님과 영도에 대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합니다.
기사님은 부산의 인구가 너무 줄어서 이제는 인천보다 못하고, 영도에는 힘이 센 산신할미가 있어서 영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 영도를 빠져나오면 잘 안 풀린다는 속설이 있는데, 본인도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문득문득 그 전설이 생각난다는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갈치 시장에서 줄가자미 회를 먹는데, 그 기사님의 말씀이 문득문득 떠오릅니다.
다음날 아침에 마주한 부산 송도 해수욕장. 바다에 떠 있는 수많은 화물선들. 초겨울의 태양이 머물다 가는 부산 바다.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다녔던 위험한 여행들, 20대 시절의 그 가난한 여행들. 삶의 고달픔 속에서도 전국 곳곳을 돌아다닌 덕에 어디를 가더라도 그 시절의 어린 내가 박제되어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유전자에 뭔가가 들어있어서 우주 최강의 낙관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 시절의 초라한 제 뒤에는 늘 드넓은 바다와 하늘이 서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병들어도 마음이 찌들지 않았던 것은 제 마음에 물들어 있는 대자연의 힘이었나 봅니다.
영도 메리어트 호텔 1605호 테라스 풍경
사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여행 중독이었던 저는 20대가 되면 큰 자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더 힘든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틈만 나면 꿋꿋하게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대부분 걷고, 정말 최소한으로 먹는 그런 여행이었습니다. 심야 버스를 타고 밤새 달려서 새벽에 도착한 20대 초반의 부산. 피곤한 몸으로 아침 버스를 타고 해변으로 이동해서 태종대 절벽에서 바라보던 푸른 바다는 내 삶의 모든 피곤과 배고픔이 사라지는 기적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내 인생의 인과를 넘어서는 기적이 있다는 믿음, 그것을 준 바다가 바로 부산 바다입니다.
파라다이스 호텔 928호 테라스 풍경들
결혼 15년 차, 아이 셋을 키우는 아줌마가 되어 부부 함께 부산을 방문한 지금은 산해진미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영화에서 나올법한 푹신한 침대에서 잠들고, 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호텔 테라스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해운대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20대 시절의 저는 아직도 바다 앞에서 온몸을 웅크리고 하염없이 걷고 있습니다.
바다는 우리 둘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시절의 어린 당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의 당신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둘은 다르지 않습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과거의 무엇도, 지금의 그 어느 것도 후회하지 마세요. 당신이 찰나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 기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