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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Oct 18. 2023

후배보다 못하다는 자괴감


아끼는 후배가 있다. 같은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는데 담당하는 브랜드는 다르다. 직급은 같지만 나보다 나이가 어리고 경력도 낮으니 그냥 후배라고 생각하는 동료다.


이 친구는 광고회사에서 경력을 쌓았다. 최신 트렌드에 밝고 말과 행동이 센스 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메시지 기획에 탁월하다. 타고난 재능이 좋은 건지 혹은 광고업계에서 배운 능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이 친구는 마케팅 업무와 잘 어울린다.


그에 비해서, 자칭 선배라고 칭하는 나의 센스는 한참 부족하다. 제약회사 경력만 쌓아서 그런지 내가 쓰는 카피는 너무 진부하다. 좋게 말하면 정중하고 학술적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딱딱하고 재미없다. 학회, 제품설명회, 브로셔 개발 등 루틴하게 돌아가는 마케팅 업무에는 능숙하지만, 참신한 아이디어와 새로운 캠페인 기획엔 미숙하다.


실력 부족이라기보다는 머리 굵은 선임의 게으름이라고 자책했다. 그러면 덜 괴로웠다. 신입 시절처럼,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금세 후배를 따라잡을 것 같았다. 그러나 후배가 써낸 B2C(일반 소비자 대상) 카피를 보면 자괴감이 들었다. 후배는 최신 유행어를 본떠서 캐주얼한 카피를 잘 만들었는데, 시장 트렌드를 반영하면서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미지도 담고 있었다. 업계 관행에 물든 나로서는 생각조차 못한 카피였다.


속상함은 후배를 향한 질투심으로 변했다. 나보다 업력이 짧은 후배로써는 당연히 알 수 없는 정보들, 경쟁사 지인 네트워크로 얻은 자료를 무기로 선배다움을 뽐냈다. 후배는 '역시 보톡스 전문가'라며 나를 추켜세웠고 나는 우쭐해졌다. 기분 좋은 순간은 잠시 뿐, 뒤돌아서면 꼴사나운 내 모습이 우습고 부끄러웠다. 내가 써놓은 지루한 기획안을 생각하면 괴로웠다.


후배보다 못한 선배라는 자괴감으로 힘들던 나날 , 우연한 기회에 해소 실마리를 찾았다.




회사에서 보톡스 B2C 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맡았다. 고객들에게 올바른 보톡스 정보를 교육하는 프로그램데, 일반인 대중이 상대인 만큼 직관적인 컨셉과 네이밍이 필요했다. 사람들의 눈과 귀에 찰싹 달라붙을 말랑말랑하고 트렌디한 카피! 내가 가장 못하는 부분이라서 며칠 째 골머리를 앓았다.


고민할수록 머리가 꽉 막혀서 좋은 생각이 안 떠올랐다. 답답함에 한숨을 쉬었는데, 조용한 사무실이라 좀 크게 들렸다보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후배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 후배: 과장님, 무슨 일 있어요? 엄청 바빠 보여요.

- 나: B2C 교육 프로그램 때문에요. 가볍고 말랑말랑한 네이밍이 필요한데 도저히 생각이 안 나요.

- 후배: 아아, 보톡스랑 필러 교육 프로그램 말이죠? 어차피 제 품목(필러)도 포함되는데 네이밍 저도 고민해 볼게요. 저, 이런 거 잘해요 ㅎㅎ


뜻밖의 도움의 손길을 받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내 일을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후배의 선의가 고마웠고, 하필 제일 못하는 부분을 결국 도움받는 스스로의 처지가 부끄러웠다. 어쨌건 후배의 도움으로 스트레스를 하나 덜었다.


30분 뒤, 모니터에 메시지 도착 알림이 울렸다. 후배의 메시지였다.


- 후배: 요즘 유튜브 용어 중에 #GRWM이라고 'Get Ready With Me = 함께 준비해요'라는 게 있거든요? 외출용 메이크업이나 패션 준비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했는데, 요새는 공부/여행 등 모든 콘텐츠에 쓰이고 있어요. 요걸 활용하면 어떨까요?


후배는 #GRWM 컨셉와 함께 몇 가지 네이밍 아이디어를 공유해 줬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최근 SNS에서 인기 있는 유행어였다. 보톡스/필러를 찾는 소비자에게 친근하고 세련되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카피였고, SNS에 둔감한 나로서는 떠올리기 힘든 생각이었다. 최신 유행을 반영한 네이밍을 겨우 30분만에 여러개 만들 수 있는 능력? B2C 분야에서는 후배의 센스와 실력이 월등함을,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음을 승복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납득하니 후배를 향했던 주제넘은 질투심도 사라졌다. 속이 후련했다.


- 나: 고마워요, 내가 진짜 맛있는 커피 쏠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건넨 뒤, 후배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프로그램 기획안을 완성했다. 트렌디한 톤앤매너 포장이 어려울 뿐, 그간의 경력을 바탕으로 교육 형식과 내용은 금방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잘하는 것과 부족한 부분. 갈고닦아서 더욱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과 그럴 바엔 더 나은 이의 도움을 구하는 게 효율적인 부분. 스스로의 역량과 잠재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작년 말, 마케팅 임원과 1:1 면담을 했었다. 한 해의 성과와 보완할 점 그리고 향후 계획에 대한 선배의 조언을 듣는 자리였다.


임원이 말했다.


"나우나우 과장은 충분히 능력 있는 실무자입니다. 앞으로도 쭉 실무 전문가로서 경력을 쌓아갈지 혹은 매니저로써 커리어를 바꿀 것인지, 이제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나는 매니저에게 필요한 역량을 물었다. 임원은 잠시의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타인의 도움을 이끌어내는 역량입니다. 매니저는 실무자가 아니기에 모든 일을 잘 해낼 필요가 없어요. 주어진 목표 달성을 위해서 팀원의 잠재 능력을 끌어내고 독려하는 것이 매니저의 역할입니다."


B2C 교육 프로그램 기획안을 완성한 순간 마케팅 임원과의 면담이 생각났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매니저 역할엔 안 어울리다고 생각했다. 남의 도움을 기다리기보단 내가 얼른 배워서 처리하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후배의 도움으로 성과를 만들고 보니 그동안 내 생각이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못하는 부분만 도움받는 것이 아니었다. 동료나 후배가 나보다 더 잘하는 부분이 있다면 조언을 구하고 협력하는 것이 조직원으로써 성과를 만들어내는 방법이었다.


내게 매니저로써 역량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내 힘으로 모든 일을 잘 처리하는 만능인이 되고 싶다. 다만 더 높은 완성도를 위해서 이젠 선배가 아닌 후배들의 도움을 받을 단계란 것은 알겠다. 매니저던 실무자던, 이젠 혼자가 아니라 같이 일하는 법을 익혀야 할 시점이다.


타인의 도움을 이끌어내서 같이 일하게 만드는 힘은 뭘까? 새로운 화두를 고민하기 앞서서, 먼저 날 도와준 후배에게 맛있는 커피부터 쏴야겠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덕분에 살았다고 인사하며, 다음에 또 잘 부탁한다고 미리 섭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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