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처럼 많이 가본 곳이 나에게는 오스트리아다. 제일 친한친구가 공부를 해서 거의 초대를 받아 가서 관광객모드보다는 거의 현지인모드였던 것 같다. 관광객으로서의 여행과 현지인으로의 삶은 명백했다. 친구는 인종차별을 당했봤다고 했고 난 당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한국에서 작아 어리다는 무시는 받아봤지만 말이다. 친구는 일본유학을 하고 비엔나로 교환학생을 가서 꽁꼬르디아무도회에서 남편을 만났다고 했다. 음..연하라는데 난 잘 모르겠다. 오스트리아는 딩크족도 많아서 나라에서 26살까지 양육비를 준다니 우리나라도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겠다. 지금은 아이를 낳겠다고 준비한다고 연락이 끊겼지만 한때는 친했다. 그래서 일본도 엄청 자주갔다. 우동먹자고 도쿄에서 보자고 한 때가 엊그제같은데 이제 원전으로 일본은 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비엔나는 매년1번 씩 그렇게 친구가 아이를 준비하기 전까지는 갔다. 이탈리아처럼 여러도시를 간 게 아니라 거의 현지인급으로 오랫동안 비엔나에 있었다. 친구네 집은 히칭이라는 역주변인데 바로 앞에 쉘부른공원이라 매일 가서 산책을 하고 즐겼다. 비엔나커피는 비엔나에 없다는 사실만 알게되었다. 그래도 친구에게 물어보니 멜랑쥐커피가 그나마 비슷하다고 했다. 중국에는 실제로 자장면이 없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비엔나에서 한적한 전원생활을 하고 친구네 친척분이 오페라극장직원분이라 90퍼센트 할인된 티켓으로 각종 공연들을 본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좋았다. 2-3달 머물기도 해서 비엔나 구석구석은 지금 내가 본가 구석구석을 아는 것처럼 훤하다. 한국은 금방 다른 건물로 바꾸지만 에어컨도 설치하기 어려울 만큼 두꺼운 벽이지만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비엔나 사람들을 소망을 따라 비엔나는 계속 비엔나였다. 늘 그 자리에 나무처럼 서있어서 언제든 오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비엔나 소세지도 한국에서 유명해서 영양교육전공자답게 물어보았는데 아예 다른 함량이어서 머쓱했던 기억이 있다. 소세지는 독일도 유명한데 처음의 번역이나 적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미국식으로 번역되는 것들도 많은데 프라하에서 기차예매하다가 프라하가 없어서 당황했는데 친구남편이 프라끄로 찾아야한다고 했다. 내 생각안에서의 내 생각, 이런 것이 진정한 여행에서의 깨우침이 아닐까?
친구가 비엔나대학교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석사과정을 공부해서 비엔나 대학 도서관을 갈일이 많았는데 도서관이 그냥 박물관이다. 내부까지는 어려웠지만 안 뜰에서도 공부하고 자유로운 방식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난 여기서 임용고시 공부도 했었다. 워낙 티오가 없는 전공이라 처음에는 열심히했지만 우리 전공 티오를 거의 없앤 것을 보고 나라에 기대하는 바가 없어졌다. 문든 일반사회전공 티오를 0으로 만들어서 장관 독대를 해서 1명의 티오를 확보했던 학생분이 생각난다. 계획이 없는 나라같기도 했고 그래서 니는 26살까지 양육비를 받고 국회의원들이 존경받는 비엔나여서 약간 부러웠다.
유관순언니가 어떻게 지킨 대한민국인가..참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다.
오스트리아는 [키스]로 유명한 클림트의 고향이다. 이 화가를 좋아해서 관련된 서적을 거의 다읽은 것 같다. 부모님께서 금세공업자여서 금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금색을 좋아하는 나와 그래서 통했나 싶었다. 클림트의 그림 중에 알려지지 않는 그림을 제일 좋아한다. 나만 아는 비밀같은거 같다.
에곤실레도 유명한 오스트리아 화가다. 선을 이용한 스케치가 많이 유명하다. 그런 그림뿐만 아니라 다른 그림들도 많이 그렸는데 전체를 알아야 그 사람이 바로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의 고향에서의 화가의 그림과의 조우 가슴 떨리는 경험이다.
중국은 그래 이렇게 가려고 했어. 가까우니깐
하나투어 크루즈에서 선물로 면세점 상품권을 주어서 지난 여행에 사용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인지 깜박하고 면세점에 산 물건을 놓고 왔다.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그래서 다시 찾을 여러 방법을 알아봤지만 면세구역이라 직접 가야하고 한달 안에만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면세점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디저트라.. 난 여행사에 전화해서 가장 빠르게 출국하는 나라를 물었고 그렇게 난 중국 제남에 가게 되었다.
제남은 처음 들어봤는데 우선 짐을 꾸리고 갔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안유명한 것은 아니고 유명한 것도 아니다. 제남은 심지어 많은 글들이 한국어다. 뭐지? 이렇게 한국 사람이 많이 온다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산에 많이 오르는 것 같았다. 예정에 없었지만 그래서 더 신이 났다. 식당도 다 한국어다. 신기한 일이다. 이런 곳이 존재하는 구나.
그런데 갑자기 온 여행에 친구도 없고 와이파이를 못하겠다. 며칠만 참아보자고 했는데 와이파이 도시락을 해온 분이 같이 쓸 수 있다고 해서 와이파이 도시락에 대해 또 배웠다. 세상 좋다.
산과 산을 넘어간다고 했는데 투명다리라니.. 난 가겠다고 했다. 고소공포증도 있었고 무서웠다. 엉엉 울어버렸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손을 잡아주셔서 굴욕적으로 기어갔다. 카노사의 굴욕이 이랬을려나. 모든 사람이 쳐다본다. 손을 잡아 주신 분의 남편은 짚라인을 타려고 오셨다는데 성향이 이렇게 다르다. 하긴 어렸을 때 4남매 다 겁이 많아서 엘리베이터도 못타서 우리 아빠는 아파트를 팔았다. 역시 멋진 우리 아빠, 자식들 일이라면 그리고 고모부가 일찍 돌아가셔서 셋째 고모네 자제들까지 챙기는 모습. 오빠들은 그래서 명절이면 늘 아빠를 찾아왔었다. 그래서 아빠의 사랑을 팔분의 일만 받은 거 같지만 내 울타리가 되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늘 선택권을 주고 강요하지 않으셨던 진정한 교육자시다. 보여지는 교원자격증이나 학벌이 무슨 소용인가? 진정한 것은 마음이다. 어떤 것을 보던 어떤 일을 하던 늘 가슴 속 깊이 자리 잡고 따르고 싶은 그런 것이 가족을 떠나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