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라! 한 번도 없던 아이디어인 것처럼!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도서 1장 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T.S. 엘리엇은 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설픈 시인은 흉내 내고 노련한 시인은 훔친다. 노련한 시인은 그것들로 훨씬 더 멋진 작품을, 적어도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어낸다. 훌륭한 시인은 훔쳐 온 것들을 결합해서 완전히 독창적인 느낌을 창조해 내고 애초에 그가 어떤 것을 훔쳐 왔는지도 모르게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탄생시킨다.” 그래서 저도 20년 넘도록 훔치는 중입니다. 여기저기서 티 안 나게. 완전범죄를 꿈꾸며...]
아이디어를 도둑질하기 가장 좋은 장소 중 하나는 서점입니다. 저는 종로에 갈 때는 종로 서적에서 신촌에 갈 때는 홍익문고에서 약속을 정하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물론 강남의 경우는 뉴욕제과였지만요. 뉴스에서 보니 코로나 특수(?)까지 더해져 대형 인터넷 서점 매출이 지난해 1천억이나 더 늘어났다고 합니다. 요즘은 온라인으로 책을 사는 게 당연하고 ‘바로드림’이나 ‘나우드림’ 받을 때만 오프라인 서점에 가는 시대입니다. (사족이지만 이것도 온라인 매출로 잡힌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책만큼은 손에 쥐어보고 책장을 넘겨보며 고르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눈치 안 보고 아이디어 도둑질도 할 겸 서점에 자주 갑니다.
출발은 베스트셀러 섹션 너로 정했다
일단 서점에 왔다면 그냥 시선 가는 대로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시작은 가볍게 베스트셀러 섹션을 추천합니다. 트렌드를 읽기에 이만한 게 없습니다. 하지만 ‘베스트셀러 순위는 모바일로도 손쉽게 볼 수 있는데 굳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빠르게 인정합니다. 그래도 분야별 베스트셀러 책들의 실물을 쭉 스캔하면서 받는 영감에 비할 수 없다고 저는 우겨보겠습니다. 사실 홍보하는 사람들은 보도자료 헤드라인을 달 때 베스트셀러 제목을 많이 가져다 씁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한참 인기일 때 ‘맘껏 먹지만 살은 안 찌고 싶어! OOOO에서 저칼로리 △△△ 출시’ 혹은 ‘생얼처럼 보이고 싶지만 잡티는 가리고 싶어! 더 완벽해진 커버력으로 리뉴얼된 OOO톤업 크림’ 이렇게 헤드라인을 단 보도자료가 많이 생산되었을 겁니다. 기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딱 이거든요. 아이디어를 훔치러 왔으니 책 내용보다는 최대한 많은 표지를 스캔하면서 제목에 집중해봐도 좋습니다.
큐레이션에서 트렌드를 읽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볼 것은 바로 각 서점에서 정성을 들인 큐레이션입니다. 특히 연말, 연초에 서점을 찾는다면 요즘 사회의 트렌드를 한눈에 보기 더 좋습니다. 지난 연말에 갔던 용산 아이파크몰 영풍문고의 큐레이션을 보면서 ‘메타버스’, ‘ESG’가 역시 2022년에도 마케팅과 홍보의 핵심 키워드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건강, 트렌드를 주제로 한 여러 (전형적인 혹은 감흥 일도 없는) 큐레이션 속에서 눈을 번쩍이게 했던 건 ‘유 퀴즈 온 더 블럭 출연 자기님들’이라는 이름이 붙은 도서 모음이었습니다. 유퀴즈에 출연했던 자기님들이 쓴 책만을 모아서 소개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직업 병적으로 ‘이들 중에 내가 담당하는 브랜드의 앰버서더나 인플루언서로 어울릴만한 사람은 누가 있을까?’, 혹은 ‘클라이언트 중에 유퀴즈에 나가서 화제나 감동을 줄만한 자기님은 없을까?’를 생각합니다. 책 표지를 들추면서 빠르게 저자들의 개인 SNS 계정을 훔쳐 가는 것도 잊지 말아야죠. 특히 이런 큐레이션은 서점마다 획일적이지 않아 보는 재미, 훔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요즘 뜨는 OO이 궁금하면 여행 서적 섹션으로 가자~
라이프스타일에 관련된 아이디어를 얻기에는 여행 서적 섹션이 제일 좋습니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어려워지면서 동남아나 유럽 여행정보를 소개하는 전형적인 책들이 줄어든 대신 그 자리를 흥미로운 ‘동네 여행’ 책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아는동네 아는을지로’, ‘아는동네 아는성수’에서 ‘당신이 몰랐던 화성’, ‘코리아둘레길 해파랑길 미식가이드북’까지. 요즘 사람들이 어디에 가고 무얼 먹고 싶어 하는지 금방 읽어낼 수 있습니다. ‘저는 OO브랜드 론칭 행사는 여기서 하면 좋겠다’, ‘OO 맥주 푸드 페어링은 이런 식당이 딱이네’, ‘이런 감각 있는 출판사와 협업으로 브랜디드 콘텐츠를 만들어야겠다’와 같은 아이디어도 훔치는 편입니다. 클라이언트나 업계 사람들을 만날 때 감각 있는 사람으로 보일만한 (그러나 알고리듬이 추천해 주지 않는) 장소들을 알아가는 덤도 무시 못 하죠.
매거진 섹션... 아쉽지만 거르긴 섭섭하니까
사실 예전에는 잡지 섹션에서 트렌드를 읽었습니다. 요즘 잘 나가는 화장품 브랜드가 무엇인지는 엘르나 코스모폴리탄 같은 잡지에 붙은 부록만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라떼는 매달 잡지가 새로 나오는 20일 경이되면 서점에 잡지 부록만 따로 모아 전시하는 코너에 사람들이 몰리기도 했었는데 말이죠. 요즘은 표지를 스캔하면서 어떤 셀럽이 핫하구나 정도만 휘리릭 보고 갑니다. 대신 감각적인 무크지들이 많아진 건 반갑기도 하고, 새로운 시각의 아이디어를 많이 발견할 수 있어 고맙기도 합니다.
협업의 기회도 읽어보자
어라? 영풍문고에서 어떤 책을 고를지 고민될 때, 밀리의 서재 독서 트렌드를 참고하라고? 밀리의 서재가 분석한 2021 독서 트렌드 리포트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드는 생각. 영풍문고와 밀리의 서재는 서로 경쟁관계 아닌가? 사실 브랜드를 경쟁구도로 줄 세우는 것도 제 오래된 (어쩌면 쓸데없는) 습관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구찌와 발렌시아가가 콜라보를 하는 시대에 오프라인 서점과 독서 앱의 협업은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이 둘은 케어링 그룹의 자매 브랜드입니다만 구찌 로고가 박힌 발렌시아가 백은 옛날 사람인 저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전보다는 줄었지만 서점은 여전히 책을 매개로 다양한 마케팅이 진행되는 공간입니다. 밀리의 서재 트렌드 리포트처럼 서점에서 배포하기 좋은 콘텐츠가 있다면 협업을 해봐도 좋겠죠.
상업적인 글쓰기의 교과서 띠지!
책을 마케팅할 때 가장 중요하다는 띠지! 저는 책을 사면 바로 띠지부터 떼어버리는 편인데(읽을 때 귀찮거든요.), 책을 고를 때는 제목만큼 눈여겨봅니다. 무슨 수상, 누구 추천 등등 여러 가지가 담기는데, 요즘은 ‘넷플릭스 화제작’(예전 같으면 MBC 드라마…뭐 이런 게 쓰여있었겠지만요.), ‘유튜브 조회 수 1억 회 돌파’ 이런 문구가 단연 많습니다. 제목보다는 좀 길지만 그래도 기껏해야 두 세줄 정도의 문장으로 책을 집어 들게 하는 카피 라이팅은 상업적인 글쓰기에 특히 도움이 됩니다. 띠지 속 주옥같은 문장들을 많이 읽어가세요. 요즘 베스트셀러인 ‘불편한 편의점’ 띠지에는 광동 옥수수수염차와 함께하는 이벤트도 들어있습니다. ‘책차하자?’ 책을 보면서 차를 마시자는 문구가 좀 억지스럽다고 느껴지지만 ‘편의점’ 이야기를 다룬 책과 편의점 대표 음료가 프로모션을 함께 하는 접근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책에 어떤 제품을 페어링 해 프로모션 하면 좋을까로 또 생각이 번져갑니다.
사실 별생각 없이 책들을 둘러보다가 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거지, 꼭 뭘 찾고야 말겠다는 맘으로 검색을 해서 찾아지는 건 아니지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점에 자주 갑니다. 전설적인 코미디 배우이자 작가인 존 클리즈는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노트북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너무 공감하는 얘기라 직원들에게도 자주 얘기하곤 하는데 디지털 네이티브들에게는 일절 공감이 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적절한 비교는 아니겠지만, 도둑들도 나름 자기 전문분야가 있듯이 아이디어를 훔치는 나만의 방법은 다들 따로 있겠죠? 서점 말고 또 아이디어를 훔치기 좋은 데는 어디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