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 경주

국내여행, 경주

by jiya

수학여행으로 익숙한 경주.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나이가 되어 경주라는 지역도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친구와 국내여행 이야기가 나와, 희미한 기억을 쨍하게 덧칠하기 위해 경주로 향했다.

주요 포인트만 콕콕 집어 둘러보는 수학여행과는 달리 친구와 뚜벅이 여행을 하니 자연스레 골목 구석구석 눈길이 갔다. 9월의 완벽한 날씨, 높은 가을하늘까지 더해 경주는 알록달록했다. 길섶마다 분홍색, 노란색, 흰색 꽃이 잔잔히 피어있고 붉디 붉은 석류나무가 여기저기 이정표를 이루고 있었다.


흔히 황리단길이라 불리는 경주의 먹거리 골목은 주중에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기왕 여행을 왔으니 맛있는 점심을 먹자며 한참을 가게를 둘러보는데, 신라의 수도였던 이곳은 외국 음식에 잠식당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간판마다 어딘가 엉성한 일본어와 영어가 쓰여있고, 한식은 간혹가다 하나씩 있었는데 이마저도 마음에 딱 드는 가게가 없었다. 한식은 저녁으로 미루며, 조금 쌉쌀한 마음으로 점심을 먹었다.

경주는 생각보다 관광지의 규모가 작아서 교통수단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경주 역사유적지구는 야경이 예쁘다기에, 천천히 골목을 눈에 더 담고 나오니 낮에 보았던 석류만큼 붉은 노을이 펼쳐져 있었다. 자연이 주는 힘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듯, 거리를 바삐 걷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걸음을 멈추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 정신없는 세상을 멈추고 미소를 짓게 만드는 건 거창한게 아닌, 노을 몇 분이라고 생각했다.

저녁 느지막히 향한 경주 유적지구는 입구에서부터 첨성대가 네온을 입어 형형색색으로 반겨주고 있었다. 학생 때는 첨성대가 엄청 커 보였는데, 이렇게나 작았었나- 하면서 친구와 웃기도 했다. 첨성대의 크기가 달라진 게 아니라 우리의 눈높이가 달라졌을 뿐인데, 역시 흐릿한 기억 속에서는 무엇이든 더 크게 기억하는 듯 했다.


내가 제일 기대했던 유적은 동궁과 월지였는데, 막상 야경을 보고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사람이 너무 많기도 했고,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단조로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전혀 기대하지 않던 월정교를 보고 홀딱 반하게 되었다. 문을 닫을 시간이라 거의 사람이 없었는데, 월정교 반대편에서 물가에 비친 모습이 장관이라 친구와 한참을 앉아 구경을 했다.


경주 여행은 1박2일로 잡아 짧게 둘러보고 바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가기 전 작은 해프닝이 하나 더 있었다. 경주의 명물 김밥을 마지막 점심으로 먹으려 사가는 도중 승용차에 타고 계신 무서워 보이는 스님께서 갑자기 부르셨는데, 친구는 다가가지 못하고, 혼자 쭈뼛쭈뼛 다가서니 양손 가득 밤을 담아주시며 가져가라고 하셨다. 스님 눈엔 뚜벅이 관광객을 어떻게든 챙겨주시고 싶었던 모양이다.


희미한 기억이었던 경주. 따스한 밤색 마음까지 얻어, 알록달록하고 쨍하게 새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