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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Jun 18. 2024

달라의 교환일기 - 첫번째 편지1

“뭘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울에 사는 여자와 남원 지리산 자락에 사는 여자가 편지형식의 글을 교환하기로 했습니다. 

그 첫번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Dear. 소라 


사실은 지난 한 달 넘게 좀 쓰레기처럼 지낸 느낌입니다.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티비 앞 소파에서 꼼짝하지 않고 하루를 흘려보내곤 했어요. 해가 중천에 뜰 때쯤 느릿하게 침대 밖으로 뱀처럼 빠져나와 소파로 직행했고, 맹하니 무언가를 보다 보면 어느새 집안이 어둑해졌습니다. 아저씨들이 왜 소파와 한몸인지 이해가 될 것 같은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습니다. 


안식 기간이니 충분히 쉬어도 된다며 자신을 달래어서인지 생산적이지 않은 생활에 죄책감은 별로 들지 않아요. 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갑자기 공기가 훅 더워진 계절이 되어 약간 어질하고 허탈한 느낌은 드네요. 어쩌면 이 글을 쓰고 나면 저는 스스로를 덜 쓰레기처럼 느끼게 될 것 같아 조금 설레기도 해요. 


드문드문 있는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집밖으로 겨우 기어나와 보면, 무기력한 나와 달리 날이 갈수록 주변에 초록이 무성해지더군요. 아시다시피, 저는 지리산에 사니까요. “야-호! 나는 살아 있다!!”고 외치는 듯한 싱싱한 나뭇잎들이 어딜 봐도 징그럽게 가득합니다. 온천지 나무밖에 보이지 않고 산등성이가 너무 높아 때론 하늘마저 좁아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산 가까이 살고부턴 탁 트인 바다가 퍽 좋아졌어요. 


어쩌다 이곳에 오는 도시인들은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찬탄하겠지요. 옛날에 여기 놀러 온 지인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중형세단에서 내리며, “야,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하고 저를 부러워했는데요. 저는 그들의 선글라스와 중형세단이 사람 사는 맛 아닐까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집 앞이 계곡인데 이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 솔직히 저는 계곡 돗자리에서 벌레랑 햇볕 쫓으며 앉아 있기보다, 에어컨 쌩쌩한 스타벅스에서 폰이나 보면서 아이스 돌체라떼를 마시고 싶습니다. 쫌 시시하고 반생태적이고 자본주의적이라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욕망이지만요. 


저는 되게 즉흥적이고, 결과값에 대한 고민없이 (저)지르는 사람입니다. 소라님한테 같이 글을 써보자고 했던 것도,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던져본 것이었지요.(저는 많은 일을 이런 식으로 합니다;;) SNS에서 댓글만 주고받아도 웃음이 나고 흥미롭고 통찰이 있는 대화가 가능한 우리니까(!), 정기적인 글로 생각과 마음을 나눠보면 좋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뭘 써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제안했는데, 소라님과 어떻게 쓸까 같이 의논하면서 “뭘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누구한테 청탁 받은 것도, 누구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도 아닌 글을 누군가와 같이 쓰는 이 경험이 신기하고 새롭습니다. 저 자신과 대화하는 동시에 소라님과 대화하고, 몇몇의 독자들과 대화하는 글이 될 것 같아, 나와 타인 모두와 관계 맺는 글쓰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듭니다.^^ 


관계 맺기엔 젬병인 제가 이런 기대를 하다니, 위 문장을 쓰고 나서 흠칫 혼자 놀랐네요. 10대 때 왕따를 당한 일이나 타인과 유대감 쌓는 게 어려웠던 건 사춘기가 심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40이 넘어도 그것이 안 되는 걸 보면, 저는 태생적으로 관계 맺기에 재능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미용실에 갔다가 옆자리 손님이 헤어 디자이너 분에게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놀랐어요. ‘아니 왜 저런 이야길 남한테 하지?’ 


저는 아토피 때문에 파마와 염색을 할 수 없어 머리 꾸미기는 오직 커트만 가능한데요. 커트 잘하는 미용실을 찾아 이곳저곳 유목민처럼 떠돌다 지금의 미용실에 정착한 지 몇 년 됐지요. 제가 우리 헤어 실장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실력도 출중하지만(네이버 평점 4.8), 저에게 쓸데없는 말을 전혀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장님이 말이 없는 편인지, 아님 처음부터 저에게 ‘말 걸지 말라’는 아우라가 느껴져서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친절하지 않으신 것도 아니에요. 침묵 속에 머리를 다듬는 10~20분간 저는 돌봄과 평화를 느낍니다. 


미용실은 밝은 조명에 큰 거울이 가득한 곳이잖아요. 그곳에 앉아 있으면 나의 상처와 주름, 그러니까 추함과 늙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느낌이랄까요. 어릴 때부터 거울을 잘 보지 않았던 저에게 미용실은 그래서 괜히 주눅이 드는 곳이었어요. 특히 많은 미용사들이 저의 피부를 유심히 보고 한 마디씩 얹곤 했거든요.(아토피가 심하네요, 좋은 치료법이 있어요 등등) 그런데 지금 단골 가게 실장님은 제 몸에 관해 딱 한 번 언급했고, 그것이 저에겐 큰 위로였어요.


어느 날 보조 미용사인 분이 제 머리를 감기려 할 때 실장님이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피부가 예민한 분이니까 두피 세게 누르지 마세요.” 가끔 두피 마사지를 해주려다 힘 조절을 잘못해 손톱으로 두피를 긁는 미용사를 만나곤 했는데요. 실장님 덕분에 저는 조용히 배려받을 수 있었어요. 드러내지 않게 상대를 배려한다는 건 단순히 선한 마음을 넘어 어쩌면 ‘기술’이 함께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주고받는 편지가 그렇게 서로를 조용히 돌보고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을 쌓게 해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저의 기대가 너무 큰가요?! 처음이니 그렇다 칩시다!) 오늘은 시원하게 커트도 했고, ‘달라’의 첫 편지도 써서 무기력했던 시간에 한 획을 그은 날입니다. 해가 다 져가서 조금 어둑해진 지금 창밖의 나무들이 한낮처럼 징그럽기보다 왠지 다정해 보이네요. 


이렇게 마음에 따라 모든 사물이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잘 흔들리는지 알게 됩니다. 마침 어제 아침엔 진짜 지진이 나서(!) 자다가 침대가 흔들리는 무서운 경험을 난생처음 해봤는데요. 그 순간엔 두려웠지만 흔들림이 끝나고 나서 가슴을 쓸며 안심했어요.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 자신을 붙잡고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저는 글을 써야 할 것 같아요. 같이 쓰고 읽어줘서 고마워요. 


다음 편지까지, 안녕.  


From. 달리 


#달라의교환일기 #dallaletter #여자둘이글을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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