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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Jun 18. 2024

달라의 교환일기 - 첫번째 편지2

저는 망한 걸까요? 


달리에게


달리가 쓴 편지를 막 읽었어요. 어쩜,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네요. 저는 최근 자주 나는 망했어와 나는 망한 걸까? 를 속으로 말하곤 해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주 수입원이었던 예술 활동을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쉬게 되면서 생계노동을 거진 하지 않고 있는 내가 기생충 같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나마 따순 집에서 굶지 않고 사는 건 늙은 부모가 있고 경제활동을 하며 같이 사는 동생이 있기 때문이지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험담하면서 내가 비판하는 그 가부장제 정상가족 울타리에 빌붙어 있는 기분이에요. 그런데 웃긴 건 ‘나는 망했어’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곧이어 망하면 뭐 어때 라고 다시 말한다는 거예요. 


사람을 능력으로 판단하고 역할이나 기능으로 여기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면서 저는 그 잣대를 늘 스스로에게 가져다 댑니다. 쉰이 넘어서도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역시 사회적 커리어도 미미한 저를 가혹하게 대하는 건 세상보다 저인 거 같아요. 


저는 무엇이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하는 일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일이라니요. 이 엄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글과 그림이 돈이 되기 어렵다는 걸 어린 시절에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는데 생활력 제로인 저는 늘 대책이 없어서 여성의 노동에 기생하는 무책임한 남성을 비판하다가 순간 뜨끔할 때가 많아요. 병약하고 지질한 예술가 남성을 거두는 생활력 굳건한 여성의 구도에서 전 그 여성이 아니라 지질한 남자가 된 거 같아요. 

그래서 이젠 병원행이 잦아진 엄마와 아버지를 유독 더 챙기는 것 같긴 합니다. 가족 내 돌봄의 일부라도 담당해야지만 밥값을 하는 거 같아서 말이지요. 


여성들의 돌봄 노동, 대가없는 재생산 노동에 대해 늘 목소리가 높아지는 건 제가 여성의 인권과 성평등에 각성되어서라기보다 저를 방어하기 위해서라고 집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어떤 활동과 운동, 철학도 다 (나의) 삶에 기반 하는가 봐요. 그렇다고 다 운동가와 철학자가 되는 건 아니지만 내 삶을, 내 일상을 해석할 언어를 얻는 건 멀리 있지 않은 거 같아요. 그렇다고 저의 무력감과 쓸모없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무력감과 쓸모없음을 헤아려 보는 눈을 갖는 건 그냥 무력하기만 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고 헤아리고 분별하는 것의 출발은 글쓰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재작년이지 작년인가에 달리가 ‘같이 글을 써 봐요’라고 했을 때 그냥 무작정 반가웠어요. 무진장한 활동력!으로 전방위적인 일들을 해내는 달리가 저에게 글을 쓰자고 하니 저도 무척 열심인 사람이 된 거 같고, 더 솔직히는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저에게 같이 글을 쓰자고 하니 프로포즈를 받는 기분이었답니다. 연애가 아니더라도 프로포즈는 늘 설레는 일이에요. ^^


그런데 달리는 바다를 더 좋아하는 군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데, 달리는 지혜로운 사람인가요? ^^ 저는 바닷가에서 태어났는데 바다보다는 산과 들이, 초록이 지천인 곳을 좋아해요. 비록 제가 어진 사람 같진 않지만 채도와 명도가 다 다른 초록이 펼쳐지는 풍경은 언제나 저를 황홀하게 해요. 어린 시절 크레파스 중 제일 빨리 닳아 없어지는 건 늘 초록 크레파스였어요. 그건 지금도 비슷해서 화방에 가면 여러 톤의 초록색 물감 앞에서 넋을 놓습니다. 


바다를 좋아하고 산을 좋아하는 취향은 ‘둘이서 쓰는 글쓰기’의 이름, ‘달라’처럼 다를 뿐 틀린 것은 아니니까요 무엇을 좋아하고 욕망하든 그게 뭐 대수겠어요. 처음 달리가 지은 이름 ‘달라’를 듣는 순간 내게 무엇을 달라, 라는 뜻으로 욕구나 욕망의 의미처럼 들렸는데 며칠 지나자 ‘달라’가 ‘다르다’로 다가왔어요. 

저와 달리는 나이도 다르고 기질도 다르고 사는 지역도, 직업도 다르지만 이렇게 연결된 게 가끔 신기합니다. 이런 순간의 신기함, 더 나아가 이런 순간의 신비함 때문에 대체로 지루하고 고역인 삶이 반짝 빛나는 거 같아요.


언뜻 보면 전 관계 지향적이고 사람 사이에서 잘 지내는 듯 보이지만 관계는 늘 어려워요. 나이 든다고 경험이 쌓인다고 나아지거나 능숙해지지 않는 것 중 제일은 관계인거 같아요. 그런데 요즘에 드는 생각은 관계 맺기는 잘 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아닌 거 같아요. 그냥 그런 것 중 하나같아요. 그래서 전 그냥 그런 것이니 무얼 어떻게 해야지 하는 마음을 좀 거두기로 했어요. 좋으면 좋지만 어느 날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흘려보내려 해요. 특히나 관계는 일방의 노력으로 유지되는 건 아니니까요. 


저는 한때, 아니 지금도 희미하긴 하지만 너와 나 둘 만의 친밀한 관계, 깊은 사이에 대한 어떤 욕망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관계나 사이가 가능하기나 한 걸까요? 오늘 하루 조금 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게 더 어려운 거 같아요. 달리의 사려 깊은 미용실 원장님처럼 말이죠. 그런 분은 참 귀한 분이에요. (저도 가보고 싶네요. 전 십년 가까이 곱슬거리는 긴 파마머리가 이제 지겨워지는 중이거든요.) 


달리와 제가 쓰는 글쓰기가 편지라는 게 전 특히 좋아요. 늘 편지 형식의 글을 좋아했어요. 수신과 발신이 정확한 글이 (제)마음과 (제) 생각이 허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당도할 거란 사실이 안심이 되는 거예요. 글이 모든 걸 다 알려 줄 순 없지만 그 글이 아니라면 우린 또 어떻게 한 사람의 내면에 가닿겠어요. 

누군가 글을 읽어주고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그 자체로 참 다정한 일이에요. 그래서 그 다정함이 달리와 저를 기쁘게 하길 바라요. 저야말로 엄청나게 크나큰 기대를 하는 것 같네요. ^^ 


다음 편지는 어떨까요? 한여름을 통과하고 있을 그 편지가 벌써 기대됩니다.


소라 드림


#달라의교환일기 #dallaletter #여자둘이글을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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