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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Jun 16. 2024

아는 여자 3

나이 든 여자의 얼굴이 낯설다 / 수잔 발라동 (1865년 - 1938년

나이 든 여자의 얼굴이 낯설다


  거울을 본다. 이젠 나이 든 티가 완연한 내 얼굴이 있다. 가장 친숙한 얼굴이지만 동시에 낯선 얼굴이다. 머릿속에 있는 내 얼굴은 삼십 대 어디쯤에 고정되어 있는데 얼마 전 지인이 장난스럽게 찍어 준 사진 속 내 얼굴은 여지없이 오십 대 여자의 얼굴이었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최근 몇 년 지원금을 받아서 하는 이런저런 활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주 사진을 찍었다. 그날의 활동을 증명하는 사진이라 내 얼굴이 나오게 찍어야 했다. 함께 활동하는 삼십 대 동료들과 같이 찍힌 내 얼굴은 젊은 그들과 다르게 중력의 시간이 새겨져 있었다. 드로잉 모임에 오는 내 또래 여성들에게 자화상을 그리라고 권하지만 정작 나는 나이 드는 내 얼굴을 아직 그리지 못했다.

수잔 발라동 자화상 1883년

 수잔 발라동이라는 화가가 있다. 우리가 아는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 드가, 로트렉 등의 모델이었던 수잔 발라동은 아버지 없이 가난한 세탁부의 딸로 태어나 화가가 되었다. 자신의 어머니처럼 세탁부를 하다가 서커스단의 곡예사를 꿈꿨지만 연습을 하다가 다리를 다쳐 모델이 되었다.  르누아르 그림 속 풍만하고 화사한 여인은 대부분 수잔 발라동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수잔 발라동은 르누아르 그림 속 자신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생기지 않았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화가가 되어 그린 수잔 발라동의 자화상은 르누아르 그림 속 여인과는 확연히 다르다.

 사랑스럽고 명랑한 소녀, 순진한 젊은 여자가 아니라 수잔 발라동이 그린 자화상은 침울하고 고집스러운 젊은 여자의 얼굴이다.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고 그렇다고 옷을 벗지도 않았다. 평범하고 수수한 평상복을 입고 있다. 수잔 발라동이 쉰여덟에 그린 <푸른 방>이란 그림을 나는 제일 좋아하는데 그림 속 중년 여성은 펑퍼짐한 파자마를 입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입에 담배를 물고 있다. 발치에는 책 몇 권이 놓여 있다. 젊은 여성이 침대 위에 벌거벗고 유혹하듯 누워있는 명화에만 익숙한 나는 침대가, 침실이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는 장소란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수잔 발라동은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얼굴을 많이 그렸는데 노년의 누드를 마지막 자화상으로 남겼다.

수잔 발라동 자화상 1931년


  남성의 시선으로 그린 아름다운 피사체, 혹은 성적인 존재로 그려진 철저하게 타자화 된 젊은 여성의 얼굴과 몸만 보다가 여성 화가가 그린 늙어가는 여자의 얼굴과 몸을 보는 것은 짜릿하고 통쾌했다. 미술사의 무수히 많은 남성 화가들은 나이 든 여자를 화면의 중앙에 주인공으로 그리지 않았다. 젊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기 위해 또는 아름다움에 대비되는 추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만 늙은 여자를 그렸다. 그나마 호의로 그려진 나이 든 여자를 굳이 찾자면 남성 화가가 그린 자기 어머니의 초상 정도가 전부다.

 내가 마흔이 넘어 만난, 학교에선 가르쳐주지 않았던 많은 여성 화가들, 그 여성 화가들이 그린 여자의 얼굴은 모두 다르고, 달라서 아름다웠다. 여성화가가 이토록 많다니 놀랍고 그 여성 화가들이 그린 다양한 여자의 아름다움이 발칙하고 경이로웠다. 여자의 얼굴이, 여성의 자화상이 이토록 많았는데 나는 고흐와 렘브란트의 자화상만 주야장천 배웠다.


  청춘이 스러진 자기 얼굴에 대한 낯섦과 회한이야 남성이라고 다를 바 없겠지만 나이 든 남성의 얼굴, 나이 들어가는 남자는 그림에서든 현실에서든 낯설지 않다. 사회 곳곳에 대표로 상징되는 얼굴은 압도적으로 연륜 있는 중년 남자의 얼굴이다. 노동자를 떠올릴 때, 자본가를 떠올릴 때, 예술가를 떠올릴 때, 그 얼굴은 남성의 얼굴인가? 여성의 얼굴인가? 인민의 얼굴이든 자본가의 얼굴이든, 또는 예술가의 얼굴이든 그 얼굴은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젊은 남성은 따라 배우든 혹은 싸워 넘어서든 참조할 역할모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남성으로 태어나 만난 세계에서 주체의 자리, 주인의 자리는 다 남성의 얼굴로 채워져 있다. 기득권 남성과 싸우는 것도 역시 남성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여성은 무엇을 열망하든 어디에 가든 나이 든 여자의 얼굴, 선배의 얼굴을 만나기 힘들다.

푸른 방 1923년 수잔발라동

  저녁 8시 뉴스에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중년 남성 앵커 옆에 이삼십 대 여성 앵커가 앉아 있다. 젊은 여성 기자가 안경을 쓰고 머리를 묶지 않고 나왔다고 화제가 된다. 남자야 젊던 늙던 눈이 나쁘면 다 쓰고 나오는 안경을 젊은 여자가 꼈다고 세상이 나아졌다고 한다. 머리카락을 묶지 말지도 세상 눈치를 봐야 하는데 말이다. 사회적 직업적 성취를 이룬 성공한 중년 여성이 아니더라도,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성공한 부자 언니가 아니어도 그냥 생긴 대로 자기 존재로 살면서 나이 들어가는 여성을 만나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다.

 유명하지 않아도 성공하지 않아도 창작하는 예술가로 일상과 생계를 해결하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참고 문헌 될 선배 여성을, 나이 들어가는 그 여자의 얼굴을 아직 대면하지 못했다. 아니 분명 있을 텐데 나이 드는 여자, 늙어가는 여자의 맨 얼굴을 세상은 쉽게 지우고 삭제한다. 그래서 나는 나이 드는 내 얼굴조차 낯설다.

                                                                                       

2022년 3월 월간 작은책 아는여자 연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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