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용한 언니 Jun 15. 2024

아는 여자 2

얼굴을 그린다는 것 

얼굴을 그린다는 것 


  오랫동안 어른 여자들과 그림 수업을 했다. 말이 수업이지 수다모임에 가깝다. 평일 낮이나 주말 오전 그림을 배우고자 오는 사람은 대부분 중년의 여자들이다. 이 여자들은 이제 막 자녀 돌봄과 양육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려는 여자들이거나 출퇴근을 하지 않는 프리랜서 여자들로 세상이 정한 길과는 조금은 비껴난 길을 걷는 여성들이다. 이건 그림선생인 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림을 빙자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드로잉 모임에 오는 이 여성들은 굳이 내게 그림을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예술적 재능과 지성이 넘친다. 난 이들이 이런 재능을 깊이 품고 조용히 산 것이 신기할 때가 많다. 

(왼쪽)드로잉 참여자가 그린 나의 어머니  / (오른쪽) 드로잉 참여자가 그린 퇴근길의 내모습

지난 가을과 겨울, 서울과 부천에서 진행한 드로잉 모임은 문학 속 인물을 상상으로 그려보는 것이었다. 그동안 몇 번의 드로잉 수업에서 자화상을 그리거나 인물초상을 그렸지만 참여자들은 꽃이나 풍경보다 인물 그리기를 유독 어려워했다. 자화상을 그리라 해도 영 어색해 하거나 그리더라도 내가 아닌 아들을, 딸을, 그도 아니면 남편을 그렸다. 그래서 이런 부담을 덜어보고자 좋아하는 여성작가들의 소설 속 여성 인물을 상상해서 그리는 걸로 수업 내용을 만들었다. 

착한 딸, 수용적인 엄마와 아내 역할, 혹은 좋은 동료, 선배 역할에 지친 여성들은 독립적이거나 자유롭거나 제멋대로거나 때론 괴상한 여성 캐릭터에 감응했는데 이건 내 안의 또 다른 나에 대한 욕망들로 보였다. 슬프고 좌절하고 상처받고 실패해도 용기 있게 나아가는 여성들은 소설에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문학 속 인물을 그리던 서울과 부천의 여자들은 모임의 중반이 지나자 다들 자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바라던 바였다. 문학 속 인물로 에둘러 왔지만 결국은 자기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문학 속 여성 드로잉 중 참여자가 그린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얼굴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어린 시절 내내 물리지도 않고 그린 것은 여자 얼굴이었다. 별과 진주가 세알쯤 들어가게 큰 눈망울, 작고 오똑한 코, 결코 크게 열리지 않을 거 같은 입술을 가진 얼굴이었다. 머리카락은 항상 치렁하게 길었고 작은 왕관을 쓰거나 꽃 화관을 두르고 사시사철 허리가 잘록한 드레스를 입었다. 초등학교 교실 내 책상 앞에는 예쁜 여자, 공주를 그려달라고 아이들이 줄을 섰는데 모두 여자아이들이었다. 머리를 박고 홀딱 빠져 읽은 옛이야기나 동화책의 여자 주인공들은 모조리 예쁘고 착했다. 혹 저주로 얼굴이 흉하더라도 갖은 고생 끝에 부모를 구원하고 남편을 구하면 저주가 풀리면서 절세미인이 되었다. 다들 지략이 뛰어나고 지혜로운데 순종적이어서 왕자를 만나 궁궐에 들어가 사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왕자를 구했는데도 궁궐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 물거품이 된 공주도 있었다. 여자는 결코 왕도 성의 주인도 되지 못했다. 그저 아내가 되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읽은 소설도 어린 시절의 동화보다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문자가 생긴 이래 글 쓰는 남자는 헤아릴 수없이 많아서 집어든 책의 작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죄다 남자였다. 학교에서 권한 책들도 대부분 저자가 남자였다. 남성작가가 그리는 여성들은 큰일을 하는 남자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거나 세계를 고뇌하느라 현실엔 무능한 남자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바쳤다. 충분히 멋지고 똑똑한 여자들이 남자의 여자로 존재했다. 자기주장이 강한 여자들은 사랑받지 못했고 불행하게 살다가 외롭고 비참하게 죽었다. 


시위대를 쫒아 다니는 와중에 읽은 소설도 매 한가지였다. 진보진영의 큰형이라는 소설가나 진영을 막론하고 존경받는 소설가가 쓴 소설 속 여자들 중 나를 이입하거나 이입하고 싶은 이는 없었다. 한국의 근현대를 그린 엄청나게 길고 긴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들 모두 그랬다. 그 소설을 참고 참으며 3권까지 읽다가 결국은 던져 버렸다. 현실을 고민하고 미래를 그리며 싸우는 사람은 남자였고 여자들은 배경으로 존재했다. 그렇다고 내 또래의 남자작가가 쓴 소설 속 여성이 맘에 든 것도 아니다. 남자의 지적 허세를 그럴 듯하게 채워주는 아름답고 신비한 여자들은 성적으로도 분방해서 남자들이 바라는 바를 요소요소 채워주었다. 남성작가의 글 속에 등장하는 여자는 지친 남자를 위로하는 고귀한 마리아거나 쾌락의 즐거움을 안겨 주는 음란한 이브 말곤 없었다.


 어린 시절 내내 내가 그린 그 어여쁜 얼굴은 세상이 나에게 주입한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내 얼굴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어린 내가 그린 어른 여자의 얼굴, 세상이 아름답다고 알려 준 여자 얼굴은 스스로 욕망할 줄 모르고 타인의 욕망을 채워주는 껍데기였다. 

그래서 여자가 얼굴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을 찾는 것과 같다. 그 얼굴은 누구하나 같지 않고 같을 필요도 없다. 동일한 시공간을 살아도 각자의 경험은 달라서 부모가 준 얼굴 위해 내 삶의 시간을 조각하고 명암을 채색한다. 그 얼굴의 빛과 그림자는 있는 그대로 근사하다. 내가 나로 살며 고군분투한 시간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얼굴은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자랑스럽다. 세상엔 아직 더 많은 다양한 여자의 얼굴이 필요하다. 아직 그려야 할 얼굴이 많다. 여성이 여성의 얼굴을 그려야 하는 이유다. 

                                                                                                2022년 월간 작은책 2월 연재글 

 

작가의 이전글 아는 여자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