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위로>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자식을 잃은 이에게 보내는 위로, 2부는 자신의 추방 때문에 크게 상심했을 어머니에게 보내는 위로, 3부는 동생을 먼저 떠나보낸 폴뤼비우스에게 보내는 위로다. 나는 여기서 1부 내용을 중심으로 저자와 책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1부는 가혹한 일들을 평온하게 견디며 가벼이 여긴 많은 이들이 있었으니, 자녀를 잃은 슬픔을 이겨내라는 말이 주를 이룬다. "당신의 아들은 때가 되어 죽었고, 살 만큼 살았다", "죽음은 오히려 자연 최고의 발명이며 축복"이라는 위로가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경험해 보지 않은 자의 오만한 위로라 볼 수도 있지만 세네카 또한 세 자녀를 먼저 떠나보냈다.
한편 위로 글 치고 내용이 꽤 길다.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 눈에 긴 글이 들어올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실제로 읽었을 지도 의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한 개인에게 보낸 글이라기보다는 슬픔을 마주한 이들에게 보내는 일반 보편적인 글이라 보면 어떨까 싶다. 실제로 세네카와 수취인 마르키아는 서로 친분이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일반 보편적 위로 글이라는 면에 초점을 두고 1부 내용을 요약하면, 삶과 죽음은 신에게 달렸고,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슬픔이 더 깊은 슬픔을 부르기 전에 운명과 화해하라는 내용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면 '당신의 아들은 때가 되어 죽었고 살 만큼 살았다'라는 말은 운명론적 세계관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가장 행복할 때 죽음을 바라야 한다'라는 말에서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세네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스토아학파 철학을 잘은 모르지만,) 이들은 자연에 내재한 법칙, 즉 세계 이성(logos)에 의해 운영된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 이상적인 삶이란 이성을 통해 자연의 필연적 질서를 파악하는 삶이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는 삶을 산다. 세네카 또한 스토아학파 철학자다. 세네카가 타인의 슬픔에 대해 단정적이고 날카롭고 매우 이성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다.
이 배경 지식을 알지 못한다면 세네카의 글을 진정한 위로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세네카가 스토아학파라는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이 글들이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체 이걸 위로랍시고. 하지만 앞서 말한 바, 자신도 자식을 먼저 떠나보냈고 그 사실을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볼 때, 어쩌면 이 글은 상대방을 특정하고 보낸 편지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을 읽기가 조금 더 편해질 수 있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와 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책 마무리에 옮긴이가 쓴 <작가에 대하여>, <작품에 대하여>가 있어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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