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ul Quinn Mar 22. 2023

독서의 교집합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


서경식이 쓴 『소년의 눈물』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저자의 셋째 형이 저자에게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을 담아 편지를 보낸 부분. 저자는 이 말을 자신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으며 항변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한다. "한순간 한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 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이런 절실함이 저자에게 결여돼 있었으며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결과적으로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나무랐다.




하지만 사명使命의 독서만이 독서라 할 수 있을까. 도락道樂의 독서는 안되는 것일까. 아니, 둘 모두를 취할 수는 없는 걸까. 이를테면 교집합의 공간 말이다. 사명을 도락처럼, 도락을 사명처럼 여기는 독서.




4년 전, 책을 좋아하는 어떤 학생에게 인문학이나 고전 문학 작품도 읽으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 학생은 독서 감상문에 이런 내용을 담아 제출했다. "인문학 또는 고전만 '책'으로 취급하는 사람에게 일반 문학작품을 읽으면 안 되냐는 말을 삼켜야만 했다. 내 독서는 이렇게 즐겁기만 한데, 꼭 그런 책들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학생은 도락을 사명처럼 여기는 독서를 했다.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란 없으며 재미와 취미로서의 독서를 다른 어떤 일들보다 귀중하게 여기고 있는 독서. 이런 독서를 두고 시간을 헛되이 헤프게 쓰고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그런 독서를 했다. 제목과 인물들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홀쭉이와 뚱뚱이로 묘사된 2인조 악당이 있었다. 길을 걷다가 그 2인조와 비슷한 사람을 찾으면 마음속으로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혼자 좋아했던 기억. 혼자 우두커니 서서 소설 한 장면을 떠올리고는 미소 지었던 기억. 쉬는 시간 틈을 내어 읽은 책의  내용이 궁금해 수업 내내 내 나름의 뒷이야기를 지어 냈던 기억. 나는 이 기억들의 총체다. 도락을 사명처럼 여겼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순간을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는 그런 때, 그것이 피할 수 없는 명령처럼 내려진 때, 인문학과 고전의 세계에 발을 들이밀었다. 처음엔 고독했으나 또한 그것이 내 삶과 같아 세상에 혼자 떨어져 있는 듯한 이 지독한 고독을 즐겼다. 사명이었다.




책들이 서로를 부르고 알은체하며 책장에 모이기 시작할 무렵, 세상 모든 책을 읽겠다는 다짐이 생기기도 했고, 그것이 몽상에 그칠 거라는 사실에 적잖이 실망하기도 했다. 한정된 시간을 탓하면서도, 시간 활용에 애먹는 자신에 격분했다.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 목록이 생기기 시작했고, 읽는 속도와 읽을 책 목록이 불어나는 시간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간극이 만들어졌다. 내 독서는 고독한 외로움의 독서이면서, 독서 목록의 도서를 모두 읽을 수 없다는 조급한 마음이 반영된 지독한 괴로움의 독서다. 하지만 이 괴로움은 과정의 괴로움일 뿐, 독서 지평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열어주므로 결국엔 즐거움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사명의 도락화라고 말하고 싶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그 경계에 선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채, 오로지 독서했다는 저자에게 도락은 어쩌면 사치였을 수 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사명이란 생명을 건 독서, 살기 위한 독서, 몸부림치며 읽는 독서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명이 꼭 도락의 바깥 공간이며 도락이 사명의 바깥 공간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교집합의 공간은 사명과 도락 사이를 오가는 공간이 아니다. 사명을 도락처럼, 도락을 사명처럼 여기는 공간. 사명을 인내와 인고의 쓰라림으로만 기억되는 곳이 아닌 스스로 깨달아 즐기는 공간이다. 이 교집합의 공간을 찾는 일이 
독서가의 일이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소설, 알 수 없는 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