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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메르시어, 『언어의 무게』, 전은경 옮김, 비채, 2023
레이랜드는 출판사 경영인이면서 변역가다. 병 진단, 시한부 인생, 출판사 매각, 오진 발견이라는 급격한 삶의 변화를 겪는다. 진단이 오류로 밝혀진 후 다시 열린 미래, 즉 새로운 삶의 길에서 이제 자기 언어로 작품을 쓰고자 한다. 번역을 할 때와 달리 이제는 모든 걸 결정해야 하는 위치가 되었지만 그 언어의 무게를 느끼며 한 줄 한 줄 글을 써 내려간다.
작가의 세계관
레이랜드가 소설을 '쓰는' 행위는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이다. 그것은 올바른 언어 찾기를 통해 자기 경험의 윤곽을 알아보려는 시도다. "자기가 정확하게 뭘 느끼는지 알고 싶었다."라는 레이랜드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도 자아를 찾아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데, 그렇다면 파스칼 메르시어의 작품 세계를 '자아 찾기'라고 하면 섣부른 판단일까.
현재의 부재와 시정詩情
반복되는 일상, 어떤 움직임도, 발전도 없는 상태. 그것을 현재의 부재라고 레이랜드는 말한다. 그와 안드레이는 '쓰는 행위'를 하면서 '쓰기'를 "현재를 잡아두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장면과 생각과 언어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면서도 동시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쓴다.' 그것을 레이랜드는 시정詩情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시정은 시간 경험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현재를 온전히 현재로 두는 방식, 시간을 멈추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글을 읽고 그림을 감상하고 음악을 듣는 동안 우리는 과거를 그대로 두는데, 잊는다기보다 긴장하지 않고 놓아두는 것이지. 아무리 작고 미세한 것이라 해도, 시적인 것은 우리 삶에 평소와 다른 깊이를 준다."(433쪽)
존엄성
이 책은 언어를 다루면서도 존엄을 말한다. 아내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죽인 남편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에게 모살 또는 살인 판결로 실형을 선고한 판사들에게 분노하는 장면이 나온다. "질병이 삶이 언제 끝나는지 결정하는 것을 왜 우리가 견디며 받아들여야 할까? 그걸 스스로 결정하는 게 누구나 누릴 당연한 권리라고 왜 생각하지 않을까? 누군가 이제 그냥 충분하니까라고 말하는 게 왜 훌륭하고 정당한 사유로 간주되지 않을까?"(619쪽) 같은 이유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레이랜드도 자기 스스로 삶을 마감할 준비를 하는 장면을 놓칠 수 없다. 이 존엄은 페터 비에리(파스칼 메르시어의 본명)의 『삶의 격』과 『자기 결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 『언어의 무게』는 저자 철학의 총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번역자의 삶
레이랜드는 평생을 번역자로 살았다. 언어를 향한 열정으로, 지중해 연안의 모든 언어를 습득하겠다는 다짐으로, 옥스포드 그래머학교에서 도망친 그날부터 호텔 경비일을 하면서 번역을 한다. "불필요한 반복이나 틀린 점, 리듬에서의 더듬거림, 미끄러진 장면,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 다시 말해 진부하고 형편없는 것들을 발견"해내는 번역가로서, 책의 분위기, 책의 내적 형태와 내적인 울림에 완전히 들어가 책과 함께 호흡하는 삶을 산다. "무례함과 격조, 우아함과 상스러움, 진부함과 장엄함. 언어의 차이를 넘어서 정확하게 묘사해야 하는 문장의 리듬"을 중요시하면서 그는 언어의 무게를 느낀다.
이 책은 두께만큼 다루는 주제 폭이 넓다. 앞서 말한 대로 저자의 삶과 철학의 총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쉽게 읽을 책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