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차
늦은 시간, 아직 아이 학원 수업이 끝나지 않았다. 창 밖에 흩날리는 눈발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나도 이런 날은 따뜻한 차나 와인 한잔 마시며 고요한 밤을 즐기고 싶은데…’ 내 신세를 한탄하며 계속 창 밖만 내다봤다. 거리에는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직은 차를 몰 수 있을 정도 같아서 차 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영하의 날씨에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잠깐 사이에도 양 볼이 시렸다.
이 날따라 사거리에 신호대기하고 있던 순간이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눈 오는 밤이라 그런지 거리에 차가 거의 없었다. 큰 사거리에 내 차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서 어딘가 모르게 을씨년스럽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때였다. 백밀러에 커다란 차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운전 경력이 꽤 되지만 여전히 대형 트럭이 곁에 오면 움찔하며 가슴이 쪼그라든다. 아무리 외로워도 차라리 혼자가 나은데, 굳이 내 옆으로 오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역시나 인생은 원치 않는 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덩치 큰 차는 내 차 바로 옆에 나란히 정차했다. 차 앞쪽에는 ‘제설 작업 차량’이라고 쓴 팻말이 붙어있었다. 시베리아 한파가 찾아온다고 일기예보에서 난리 더니, 길이 얼기 전에 부지런히 일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신호가 바뀌자 제설 차량은 요란하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놀라 나는 가속 페달을 밟을 생각도 못하고 멈칫하고 있었다. 그때 새하얀 염화칼슘이 소용돌이를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냥 눈앞에서 벌어진 쇼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안타깝게도 염화칼슘은 눈 내린 길바닥에만 뿌려진 게 아니라, 내 차까지 같이 하얗게 뒤덮고 떠났다. 눈 오는 날은 차량 운행을 안 하던 사람이라서 이런 경우가 처음이었다.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딱히 해결책을 취할 수도 없었다. 이 때는 한낮에도 영하의 날씨가 연일 이어지던 때여서 바로 세차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열심히 알아봤다. 염화칼슘이 붙은 상태로 일주일 정도는 그냥 둬도 차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글이 여러 개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17년 된 차를 타다가 지난봄에 큰 마음을 먹고 새 차로 바꿨다. 아직은 차량 관리를 꼼꼼하게 하며 애정을 쏟아주고 있는 단계이다. 날마다 일기 예보를 체크하며 세차하러 가기 좋은 날만 기다렸다. 며칠 정신 못 차리게 춥던 한파가 물러갔다. 드디어 세차장에 갈 수 있는 날이 된 것이다.
보통 세차장 예약 시간보다 5분 먼저 도착하는 편이다. 미리 가서 매트를 꺼내어 먼지를 털어두면 세차할 때 한결 편하기 때문이다. 이날도 여유 있게 도착한 나 자신을 칭찬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시동을 끄려던 순간 아차 싶었다. 걸레를 안 챙겨 나온 게 그제야 생각났다. 비누칠할 때 쓸 스펀지도 안 가져왔다. 처음 세차하러 오기 전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용후기랑 별점까지 꼼꼼하게 체크하며 구매했던 세차 용품인데, 그 중요한 걸 안 챙겨 오다니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제 3분 후면 세차장 이용 시간이 시작된다. 집에 다녀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 걸레 대신 쓸만한 뭔가 있을까 싶어서 트렁크를 열어봤다. 친정아빠가 필요할 때 쓰라며 넣어주신 작은 극세사 걸레 2장이 눈에 들어왔다. 몇 달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걸레가 이 날따라 아름다워 보였다. 1장은 비누칠할 때 스펀지 대신 쓰고, 나머지 1장으로 아쉬운 대로 물기를 닦아볼 심산으로 세차를 하기 시작했다. ‘촤하’하고 고압수를 차에 뿌리는 순간이면 속이 다 시원하다. 검은 때구정물이 줄줄 흘러내려가는 걸 보면 내 마음속의 묵은 때도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일단 세차 이용시간이 시작되면 30분 안에 말끔히 차를 닦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을 떠올릴 틈도 없다. 평소 굼뜬 내 모습과는 다르게 1분 1초를 허투루 보내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그 시간은 은근히 나에게 쾌감을 가져다준다. 이날도 걸레가 부족하다는 푸념을 할 세 없이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세차를 다 끝내고 주차장으로 나와서 소중한 걸레 1장으로 차에 남은 물기를 툭툭 털어냈다. 그런대로 물기 제거가 제법 되는 듯했다. 세차용 걸레를 살 때는 쇼핑몰의 홍보 문구가 진리라고 생각했다. 흡수력 좋은 큰 사이즈의 걸레가 있어야지만 세차를 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물론 장비가 좋으면 일의 효율이 올라가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모든 일에 있어서 매번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매사에 좀 유난스러운 편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장비부터 갖추려고 하고, 준비 작업을 제대로 하기 전에는 시작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준비물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도 적당히 대처할 수 있는데 말이다.
재작년에는 매주 1편씩 열심히 쓰던 브런치 글을 작년에는 몇 편 쓰지 못했다. 그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글감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주, 한주 미루게 된 것이었다. 뭐든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고 제대로 각 잡고 앉아서 해야 하는 계획형 인간으로 살다 보면 겪게 되는 부작용이다. 올해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볼까 한다. 보수를 받고 매주 정해진 주제에 맞춰 칼럼을 써야 하는 전문 작가도 아니면서, 글쓰기 연습하는 일에 왜 그리 힘을 잔뜩 주고 살았을까 싶다.
손가락에 힘 좀 빼면 어때? 그냥 매주 정해진 요일이면 브런치 앱을 켜고, 그때부터 손가락이 가는 대로 적어 내려가볼까 한다. 세차하고 나면 기분이 개운해지는 것처럼 글을 쓰고 나면 내 기분이 개운해지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