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의 유럽 나들이
새해 달력을 받으면 제일 먼저 하던 일은 여행 가기 좋은 날짜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연간 계획을 짜며 가장 주안점을 두던 일은 여행이었는데, 올해는 그러지 못했다. 중학생이 된 아이는 이전처럼 시간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예체능 전공을 준비하는 아이라서 길게 여행 떠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괜히 설레발치다가 나중에 기운 빠지는 게 싫어서 앞서 상상조차 하지 않고 지내는 중이다. 겨울방학 동안 가장 멀리 다녀온 곳은 명절에 시댁 다녀온 게 전부이다 보니 이번 겨울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하고 싶은 걸 참아가며 답답한 마음이 드는 요즘, 방구석에서 예전 여행 사진을 꺼내보며 추억 여행을 떠나본다.
가끔 나는 꿈꾼다. 아니, 다짐한다. 아이가 20살 성인이 되면, 나 혼자 유럽 한달살이를 떠나겠다고… 유럽 작은 소도시를 거닐다가 밤이면 아담한 숙소에서 일기 쓰고 있는 내 모습.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마음이 활주로 위에 떠오르는 기분이다. 나는 왜 혼자 유럽에 가고 싶을까? 그 이유를 가끔 생각해 본다. 아마도 오래전 혼자 다녀왔던 네덜란드 여행의 추억 때문인 것 같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간다. 정확히는 9년 전 겨울이었다. 5살 된 아이를 키우며 직장 생활을 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살던 중이었다. 열심히 잘 지내고 있다고 하늘에서 상이라도 내려주는 듯한 일이 찾아왔다. 유럽 왕복 항공권의 행운이었다. 티켓은 한 장뿐, 나 혼자 떠나야 했다. 그 당시 회사에서는 새로운 시스템 오픈을 앞두고 야근을 일삼던 때였다. 여러 날 휴가를 낼 수도 없었다. 로또를 사면 고작 1천 원 당첨도 잘 안 되는 나에게 찾아온 뜻밖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항공 스케줄을 검색하며 머리를 굴려봤다. 금요일 하루만 휴가 내고 주말 사이에 다녀올 수 있는 유럽 도시를 알아봤다. 이런저런 검색을 하다 보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적격인 것 같았다. 암스테르담은 공항에서 시내까지 접근성이 아주 좋은 곳이다. 게다가 네덜란드 국민들은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영어로 소통 가능한 국가이니 촉박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내 여정에 도움이 될 게 확실했다. 하루밖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반고흐 뮤지엄과 꽃시장만 보고 올 수 있으면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마음속에 여행지까지 정해두고 나니 이제 가족들 설득과 휴가 내는 일만 남았다. 나보다 더 여행을 사랑하는 남편은 흔쾌히 동의했다. 주말 동안 독박육아를 잘 해내고 있을 테니 다녀오라고 했다. 친정 부모님한테 말씀드리려니 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병상에서 고생 중인 엄마와 간호 중인 아빠한테 혼자 놀러 갔다 온다고 하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상황을 말씀드리니 엄마는 용돈 봉투까지 쥐어주시며 이왕 가는 거 더 길게 다녀오지 일정이 그게 뭐냐고 안타까워하셨다. 회사에는 하루 휴가를 급하게 꼭 써야 한다는 말 외에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묻지 마 여행을 다녀오느라 sns에 사진 한 장 올리지 못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야 여행기를 풀어본다.
스키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중앙역으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기차 타고 15분 만에 시내 중앙역에 도착했다. 비바람이 몹시 불던 날씨였지만 내 눈에는 은은한 노란 불빛과 어우러진 클래식한 유럽풍 건물만 보였다. 한 손에는 바람에 다 뒤집어진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캐리어를 끌고 호텔로 향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툴툴 거리며 날씨를 원망했겠지만 이날은 그저 유럽땅을 밟은 거 자체가 황홀하기만 했다.
이동 시간을 최소화하려고 중앙역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에 묵었다. 체크인해서 방에 짐만 두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네덜란드는 반 고흐의 나라이다. 반 고흐의 유명작품은 대부분 유럽이나 미국 유명 갤러리에 고가에 팔렸지만, 고흐의 초기 습작은 암스테르담 반 고흐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다. 운 좋게도 내가 도착한 날은 금요일 야간 전시가 진행되는 날이었다. 불금에 반 고흐 뮤지엄 관람이라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다행히 요란하던 비바람이 멈춰서 난 경쾌한 발걸음으로 고흐 작품을 만나러 갔다.
고흐의 작품은 따뜻한 색감과 구불구불 부드러운 붓터치가 매력적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초기 습작은 주로 어두웠다. 소작농의 삶을 그린 작품이 많았는데, 초기 작품을 보니 힘들었던 그의 생애가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시간 순서대로 전시된 작품들을 보다 보니 점점 다양한 색감과 고흐 특유의 붓 터치를 살린 작품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바라기와 고흐의 방, 교과서에서 자주 보던 유명작을 마주하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고흐의 모국에 와서 그의 작품 앞에 서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조용하던 금요일 밤의 뮤지엄, 작품에 흠뻑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나씩 감상했다. 결국 2층까지만 관람하고 3층에 있는 ‘꽃이 피는 아몬드나무’는 못 보고 나와야만 했다. 아쉬움과 함께 암스테르담에 나중에 또 가야 할 이유를 남겨두고 돌아 나왔다.
금요일 밤, 숙소로 돌아가자니 왠지 아쉬웠다. 비록 혼자이긴 했지만 펍에서 맥주 한잔 정도 해야 진짜 유럽에 온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하이네켄 생맥주를 한잔 시켰다. 나 홀로 떠나는 여행이 생전 처음인데, 혼자 술집에 들어간 것 또한 처음이었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맥주잔 한잔이 몹시 낯설지만 이날만큼은 어색함을 만끽하기로 했다. 하이네켄의 원산지가 네덜란드라고 하더니 이날 술맛은 꽤나 부드럽고 맛있었다. 어쩌면 기분에 취해서 더 특별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 밤을 붙잡고 싶은 내 마음을 읽었을까? 호텔 직원은 루프탑 바에서 쓸 수 있는 무료 음료 쿠폰 한 장을 건넸다.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바로 향했다. 루프탑 바는 흥겨운 음악에 리듬 타는 유럽 청년들로 가득했다. 그들과 하나가 되어 힙한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내향인은 구석 자리를 택했다. 이날은 저녁밥을 먹지도 못한 채 술만 두 잔 들이켰다. 돌아가면 후회할 걸 알면서도 야무지게 안주까지 챙겨 먹을 용기를 내진 못했다. 옥상 너머로 보이는 유럽 거리를 안주 삼아 달콤한 칵테일을 홀짝이던 밤, 영화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 순간이었다.
피곤한 줄도 모르고 꾹꾹 알차게 채워 넣은 첫날 저녁 일정을 마무리 짓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꽃시장에 갈 생각에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암스테르담 싱겔 운하를 따라서 플라워 마켓이 열린다고 한다. 여유가 된다면 근교에 나가 드넓은 튤립 꽃밭과 풍차까지 보면 좋겠지만, 도심 속 꽃시장만 해도 그저 감사했다. 둘째 날도 전날 뮤지엄에 갈 때처럼 트램을 타고 싱겔 운하로 향했다. 겨울이라 생화 대신 조화를 파는 집이 많았다. 다행히도 한 집에서 생화를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네덜란드의 꽃, 튤립이 대표선수처럼 제일 앞 단을 장식하고 있었다. 싱그러운 튤립 한 단 품에 안고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짧은 일정이 야속할 뿐이었다.
아침 꽃시장 구경을 마치고 나니 슬슬 다른 상점도 문을 열 시간이 됐다. 낙농업이 발달한 나라답게 각종 치즈를 파는 상점이 줄지어 있었다. 치즈만 파는 가게라니, 이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치즈를 즐겨 먹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김치만 파는 가게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떠올려봤다.
운하를 따라 걷다 보면 기념품샵도 꽤 보인다. 동화책에서 보던 귀여운 나막신 모양의 기념품은 색깔과 모양이 어찌나 다양하던지, 결정장애로 한참 고민하다가 딸아이 선물을 구매했다. 여기서 사온 핑크색 나막신은 꽤 오랫동안 아이가 실내화로 신고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겨울왕국에서 크리스토프가 신던 신발처럼 생겨서, 디즈니 공주 놀이에 빠져있던 5살 아이한테 딱 맞춤이었다.
이곳을 기념할 만한 내 선물도 하나 챙겨가고 싶어서 사봉 매장에 들어갔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입점되어 있는 브랜드이지만, 이때만 해도 해외에 가야지만 만나볼 수 있어서 특별했다. 블링블링 샹들리에가 걸린 우아한 매장에서 달달한 향을 느끼며 손 씻고 로션 바르며 테스트해 보는데, 매장 언니가 꽤 친절하게 공주대접 해주는 것 같았다. 그 기분에 홀딱 취해 묵직한 오일 스크럽과 로션을 사들고 고풍스러운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나중에 숙소에 돌아오니 쇼핑백을 들었던 팔이 뻐근하게 느껴져서 웃음이 났다. 팔뚝에 알이 배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돌아다녔나 보다.
슬슬 배가 고파왔지만 비행기 탑승 시간을 생각하면 서둘러 호텔에 들려 짐을 찾고 공항으로 향해야 했다. 코를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감자튀김을 샀다. 부지런히 입을 움직이며 눈은 거리 구경에 집중했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것들이 많아서 여유로웠으면 큰 일 날 뻔했다. 시간에 쫓기며 여행하다 보니 비자발적으로 쇼핑 절제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굵고 짧은 나의 1박 3일 네덜란드 여행이 끝났다. 유럽 여행이라 하기보다는 유럽 나들이가 더 맞는 표현 같기도 하다.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지만 이날의 추억이 얼마나 진하게 남아있는지, 어언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떠올려봐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름다운 도시 경관은 물론이고, 급한 마음에 아무나 붙잡고 길을 물어봐도 친절하게 알려주던 네덜란드 사람들까지 온통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만 가득한 곳이다. 암스테르담, 언젠가 꼭 다시 들려보고 싶은 도시이다. 그때는 여유롭게 밥 먹고 고흐의 아몬드나무 작품도 꼭 보고 오고 싶다. 그날을 상상하며 오늘도 무미건조한 일상에 추억 한 스푼을 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