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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Apr 18. 2024

시계 배터리를 아예 빼버렸다.

일시 정지

“너는 어떨 때 보면 미련할 정도로 아픈 걸 참더라.”


어려서부터 엄마가 종종 나한테 하던 말이다.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멈추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앞만 보면서 내달렸다. 자전거 위에 올라타 두 발을 열심히 구르다가 갑자기 멈춰버리면 넘어지는 것처럼 내 인생도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이런 성격 탓인지 어려서부터 아파도 결석은 하면 안 되는 줄 알았고, 시험 기간이 다가오기 전에 미리 틈틈이 공부를 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와 직장은 날 배신하지 않고 좋은 성적과 칭찬으로 보상해 주었다. 달콤한 보상은 다시 날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어 줬다. 그렇게 내 인생 시계는 마흔의 문턱까지 쉬지 않고 째깍째깍 움직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계 배터리를 갈아 끼워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잠시 쉬었다 가도 좋겠다 싶어서 큰 결심을 하고 회사에서 나왔다. 그런데 배터리를 아예 빼버릴 만큼의 용기는 없었나 보다. 시계를 차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초침을 따라 계속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자기 계발 중독자처럼 온갖 인증 프로그램에 신청서를 내고 바쁜 날들을 보냈다. 책상 옆에는 영어책, 고전, 자기 계발서, 경제도서 각종 책을 쌓아두고 시간표에 맞춰 펼쳐봤다.


“엄마 요즘 꼭 학생 같아. 엄마 시간표는 왜 이렇게 빡빡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아이는 옆에서 키득거렸다. 웃음이 나올 만도 하다. 아무런 목표의식 없이 단순히 매일의 성취감에만 취해 살았으니 말이다. 내가 제일 한심하게 생각하는 부모의 모습은 아이를 쉬임 없이 학원으로 돌리는 것이다. 생각이 배회할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고 쭉 뻗은 길 위에 아이를 올려두기만 하면 아이들이 목표지점을 모른 채 그냥 달리다 지치기만 할 뿐이다. 나는 우리 아이한테는 그러지 않으면서 스스로에게는 왜 이러고 있을까? 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졌다.


급정차로 넘어져도 괜찮으니 일단 멈춰보기로 했다. 내 삶의 기본을 붙잡아줄 최소한의 일에만 집중하며 다시 균형을 잡아볼 생각이었다. 갑자기 한가해진 시간을 만끽하며 하루종일 누워있어 보기도 하고, 강아지랑 꽃길 따라 한없이 걷기도 해 봤다. 멈춰 서서 둘러보니 가까운 주변에도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문제는 이 행복한 감정이 밤만 되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하면 내 마음속의 시커먼 부유물이 요란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아무런 성과 없이 하루를 보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드는 기분이다. 어차피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거라면 차분히 앉아서 지저분한 가루들이 바닥에 싹 가라앉길 기다리면 될 텐데… 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내 마음속을 휘젓고 있었나 보다. 몸만 가만히 있을게 아니라 마음도 얌전히 지내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골이 지끈거렸다.


이른 저녁을 먹여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나니 신랑한테서 연락이 왔다. 회식 자리가 있어서 늦는다고 한다. 혼자 가볍게 샐러드 한 접시를 챙겨 먹고 소파에 몸을 뉘었다. 손은 자연스럽게 티브이 리모컨으로 향했다. 채널 버튼을 위아래로 이리저리 돌렸다. 아무런 시청 목적 없이 티브이를 켜본 게 얼마만인가 싶다. 요즘은 궁금한 영상을 직접 검색해서 찾아보는 날이 많았던 탓인지 이 순간이 참 어색하게 느껴졌다.


채널을 바꾸다 익숙한 프로그램이 나와 잠시 멈췄다. 오랜만에 ’유 퀴즈 온 더 블럭‘ 본방 사수를 해보기로 했다. 첫 번째 출연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목소리는 아주 익숙한 46년 차 성우, 강희선 님이었다. 지하철을 타면 매 정거장마다 들리던 목소리의 주인공이자 <짱구는 못 말려>의 짱구 엄마 목소리를 담당하신 분이다. 46년간 같은 일을 계속 유지해 오신 그녀의 말투와 표정에서는 프로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빈틈없는 완벽함, 오랜 경력에서 묻어 나오는 노련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목소리를 내시는 분인 만큼 그녀의 인생은 완벽 그 자체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떤 인생이든 아쉬움 없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녀는 혼자 두 아이를 키우면서 쉬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고 한다. 최근 몇 년 간은 두 차례 암수술과 47번의 항암 치료로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 투병 중에도 성우로서 책임감을 다하기 위해 병실에서 녹음한 적도 있다고 한다.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온 그녀의 삶은 그녀가 목소리 내는 짱구 엄마와 어딘가 모르게 참 닮았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가족을 위해 쉴 틈 없이 고군분투하는 짱구 엄마, 봉미선에게 강희선 성우님이 인사를 전했다.


“봉미선, 너 너무 힘들게 살지 마. 띄엄띄엄 살고, 너 자신을 사랑해.“


이 말 한마디가 요란하게 소용돌이치던 내 가슴을 가라앉히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띄엄띄엄 살아도 괜찮다는 말, 이 한마디가 나는 필요했던 것일까? 분초사회를 살아가는 부지런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혼자 제자리걸음 하다가 퇴보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나를 채찍질했나 보다.


시계를 차고 어디로 향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초침을 따라 자꾸 발을 내디뎠다. 남들의 시계는 쉬지 않고 일정 속도로 째깍째깍 움직이는데, 내 시계는 같은 자리에서 약하게 튕기기만 할 뿐이었다. 차라리 오늘부터는 배터리를 아예 빼버리기로 했다. 언제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지면 그때 완충된 배터리를 끼워 넣어 볼 생각이다.


그래도 괜찮다. 인생의 시계가 띄엄띄엄 흘러가면 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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