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조만간 있을 콩쿠르를 목표로 열심히 연습 중인 아이는 중간고사를 코 앞에 두고도 발레 수업에 빠질 수가 없었다. 수학 시험 전날에도 학원에서 돌아와서 씻으니 밤 10시가 훌쩍 넘었다. 아직 전년도 기출문제를 하나도 못 풀어봤는데 어쩌나 싶었다. 주말에 미리 챙기지 않는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시험 기간인 만큼 엄마의 잔소리는 깊숙한 곳에 넣어두기로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기출문제 정도는 풀어봐야겠다는 아이의 의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방법을 찾아봤다.
최근 2개년도 기출문제가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와있는데, 문제지와 정답만 제공된다. 풀이 방법은 각자 알아서 찾아봐야 한다. 시간 여유를 가지고 제대로 공부하는 아이라면 막히는 문제와 관련된 개념을 다시 익히고 유사 유형 문제를 풀어보면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에게 남은 시간은 시험 시작 시간으로부터 10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문제지를 한 부 더 출력하고 1번부터 직접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이가 와서 질문하면 빠른 시간 안에 바로 설명해 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요즘은 문제를 스캔하기만 하면 풀이법을 알려주는 어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아이가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 알고 있는 엄마이자, 수학 강사로서 직접 문제를 분석하고 설명해 주는 편이 더 효율적일 것 같았다.
아이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 요즘 엄마들은 아이랑 같이 공부를 또 하고 있을까? 옆에서 저렇게 떠먹여 준다고 아이 머릿속에 저 내용이 제대로 들어가기는 할까?’ 이런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중학생 학부모가 되니 예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행동을 직접 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다. 시험 결과에 실망하고 좌절한 나머지, 아이가 아예 포기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시험 볼 때 한 두 문제라도 더 맞고 자신의 학습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면, 공부를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중간에 한번 구멍이 생겨도 다음에 다시 메꾸면 되지 않을까? 맞다. 그런데 수학처럼 연계성이 강한 과목은 한번 소홀해지기 시작하면 그다음 단계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아주 쉬운 예를 들자면 덧셈, 뺄셈을 제대로 못하면 곱셈, 나눗셈도 하지 못하게 된다. 덧셈을 여러 번 반복하는 과정을 간단히 나타내는 게 곱셈이고, 뺄셈을 반복하는 과정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나눗셈이 된다는 것을 아이들은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식으로 각 단계별로 탄탄히 개념을 익히고 연관성을 찾지 않으면 상위 단계 학습이 어려워진다. 실제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받아 올림이 있는 덧셈, 받아 내림이 있는 뺄셈을 능숙하게 하지 못해서 곱셈과 나눗셈 단원을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 단순히 사칙연산만 서로 연관이 높은 게 아니라 많은 단원 간 계통성이 강한 학문이 바로 수학이다. 어린아이들 입장에서 모든 영역에 결손이 생기지 않도록 수학 공부를 이어간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단 한 번도 지치지 않고 초중고 12년을 계속 달릴 수 있는 학생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12년 간의 학습 내용을 제대로 익히는 데만 해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데, 요즘은 변별력을 위해 심화 문제, 킬러 문항이 시험마다 꼭 나온다. 나도 아이 학교 중2 중간고사 기출문제를 풀어보면서 타이머를 맞추고 앉아서 풀어봤다. 평소 아이들한테 개념 설명, 문제 풀이를 해주는 일만 반복했지 직접 시험 응시하듯이 문제를 풀어본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25문항을 다 푸는데 꼬박 40분이 걸렸다. 시험 시간이 45분인데, 실전 시험에서는 답안지에 마킹까지 그 시간 안에 다 해야 한다. 다행히 틀린 문제는 없어서 수학 선생님으로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지만, 진짜 고사장에서 시험을 봤다면 시간에 쫓겨 심장이 아주 쫄깃해졌을 것 같다.
이전 학년에서 배운 개념 위에 해마다 새로운 개념을 계속 쌓아 올려야 하고, 짧은 시간 안에 문제를 풀어내기 위한 훈련을 수없이 반복해야 고득점 획득이 가능하다니…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학이 좋아서 학창 시절에는 다른 과목 공부하다가 하기 싫으면 수학 문제집을 풀던 학생이었다. 대학에서는 통계학을 전공하고 직장에서는 수학적 사고 능력을 활용한 업무를 15년간 했다. 현재는 아이들 수학 교육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수학을 빼놓은 인생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 각 잡고 앉아서 중2 중간고사 문제를 풀어보니 만만치 않다는 게 느껴진다. 이러니 아이들 입에서 수학을 포기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게 생겼다.
실제로 시험 감독을 하러 학교에 가보면 수학 시간이면 답안지에 이름만 적고 바로 엎드려서 자는 아이들이 있다. 요즘은 중고등학교 시험 기간이면 학부모가 부감독 역할을 하기 위해 학교에 간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학부모 시험 감독을 지원했다. 작년에는 중3 교실에서 시험 감독을 했는데, 28명 중 2명이 이름만 쓰고 바로 엎드렸다. 올해는 중2 교실에 들어갔다. 여학생 한 명이 수학 시험지를 받아 들자마자 서랍에 넣었다 뺐다를 두세 번 반복했다. 혹시라도 부정행위를 할까 봐 감독관 선생님과 나는 그 학생에게서 관심을 뗄 수 없었다. 유심히 봐도 수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문제를 풀까 말까 잠시 고민했던 게 아닐까 싶다. 결국 여학생은 한 문제도 풀지 않고 45분 동안 머리만 매만지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사각사각 소리 내며 쉬지 않고 문제를 푸는 동안 이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태연한 척 윤기 나는 머리만 계속 쓰다듬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바짝 마르고 갈라지지 않았을까?
나는 우리 아이가 예체능 전공 여부와 상관없이 기본적인 수학적 사고 능력을 갖추도록 곁에서 도와주고 싶다. 최소한 중등 수학 정도는 알아야 이다음에 경제 생활 하는데 본인이 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가 만약 예체능을 그만두고 일반고 진학을 하게 된다면 중등 수학 기본을 알아야 고등 수학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학교의 평가 수준은 기본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러니 아이의 시험 대비에 곁에서 같이 애쓸 필요가 있나 싶고,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을 수시로 한다. 그러다가도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낮은 점수에 반복적으로 좌절하다가 아예 수포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기본도 익히지 않을까 걱정된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시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진짜 필요한 수학 교육을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수학 교육자 엄마로서 해결해야 할 큰 과제를 하나 오늘 정했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수학 상식 쌓기, 최소한의 기본 개념 익히기를 아이와 꾸준히 할 수 있도록 노하우를 연구하고 실행해 보기!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면 금방 휘발되어 버리니까 글 속에 박제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