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2022)
*<헤어질 결심>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영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헤어질 결심>을 본 직후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었다. 할 말이 없는 영화라서가 아니고 할 수 있는 말이 내 머릿속엔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선 영화에 못 미치는 글을 쓰기에 앞서 나의 부족함에 핑계 아닌 핑계를 남기기 위함이다. 물론 모든 영화 글은 그 영화를 닮으려 애쓰지만 결코 그 영화를 보는 것에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특히나 이 영화가 가지는 풍부함에는 나의 글이 미치지 못할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영화에 미치지 못하는 글을 쓰는 것이 <헤어질 결심>에 대한 나의 감상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만 각설하고,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의 마지막으로 가보자. 푸른빛의 파도가 벽지에 수놓아진 서래의 방을 닮은 그 해변으로. 서래의 뒤를 쫓아가던 해준은 자신이 서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녹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란다. 나 역시 놀랐다. 해준은 서래에게 "사랑한다"라고 말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도대체 해준이 언제 사랑한다고 말했단 말인가. 서래는 의미심장한 말만 남긴 채 사라졌고, 답답한 해준은 서래의 차량에서 휴대폰을 발견해 서래가 말한 녹음 파일을 다시 듣는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녹음 파일을 들은 해준은 자신이 "사랑한다"라고 말한 적이 없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조금 뒤늦게, 자신이 "사랑한다"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이미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음을 해준은 깨닫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서래는 이미 자신의 최후를 맞이했고, 해준은 영원히 찾을 수 없을 서래를 찾아 물이 밀려오는 해변을 뛰어다니며 영화는 끝이 난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읽을 수는 없다. 이 말은 단지 증거물을 은닉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주문이 아니다. 확실한 증거를 찾았음에도, 자신이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서래의 범죄 사실을 숨기는 해준의 결연한 한마디다. 자신을 붕괴시켜가면서까지 서래를 지키겠다고, 그러니까 다시 말해 서래를 사랑한다고 해준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자신을 붕괴시키고 있기 때문에 해준은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했음을 밝히고 있다. 저 핸드폰은 바다에 버리라는 문장은 사랑 고백과 이별 통보가 모두 담긴 아이러니다. 그러면서 사랑이나 이별의 한 글자도 꺼내지 않는다. 이것을 언어의 비극이라고 해도 좋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에 기표는 기의와 완벽하게 일치하거나 대응하지 못한다. 말하고자 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불일치. 끝없는 간극과 어긋남. 말하고자 하는 것을 둘러싼 안개.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과 사랑 사이의 간극을 뒤늦게 깨달은 해준처럼, 영화의 상영이 끝난 자리에서야 뒤늦게 영화가 온통 그 간극으로 채워져 있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언어의 간극이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서래가 번역기를 경유해 해준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서래는 중국인이다. 늘 처음 자기를 소개할 때 중국 사람이라 한국말이 서투르다는 말을 덧붙인다. 따라서 종종 서래는 중국어로 이야기하고 해준은 번역기를 경유해 서래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번역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지연이다. 소통 과정에서 시간의 지연이 발생하는 것이고, 서로 다른 언어는 모든 의미를 일대일로 대응시킬 수 없기 때문에 번역을 통해서는 결코 전하고자 하는 말을 온전히 전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형사의 마음을 가져다 달라"는 말은 "그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는 어딘지 섬찟한 말로 전달되기도 한다. 또 한국말이 서투르지만 사극과 드라마를 통해 한국어를 배운 서래의 말투는 어딘지 품위 있으면서도 종종 상황에 맞지 않을 정도로 고풍스럽기도 하다. 서래가 맥락에 맞지 않게 발화한 "마침내", "단일한" 같은 단어는 한국인 사용자 사이에서 그것이 발화되는 맥락과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그것들이 보통의 경우 갖고 있는 의미보다 풍부한 의미를 해준과 서래 사이에서 갖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맥락을 알았을 때에만 비로소 획득하는 감각을 지닌 단어들이 서래와 해준 사이에서 맴돈다. 그 단어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에 부여된 맥락을 모두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도 역시 일종의 지연이 발생하게 된다.
해준이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파헤치는 태도에도 모종의 시차가 존재한다. 사건은 이미 일어난 일이고 그것의 뒤를 되밟아 간다는 점에서 시차(時差)가 발생하고, 현장에서 시신의 눈을 보며 그 눈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범인을 반드시 찾겠다고 되뇌는 것 역시 시차(視差)에 관한 것이다. 영화에 이따금씩 죽은 눈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시점 쇼트로 보여주는 것은 이 시차들에 관한 것이다. 해준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이 시차를 극복해야 한다. 그렇기에 피해자가 떨어진 경로를 그대로 다시 올라가고, 범인이 범행을 위해 지나간 길을 정확하게 다시 밟아 올라간다. 시계를 범행 시각에 맞춰놓고, 사건 당사자의 눈으로 사건을 되짚는다. 그리고 이 시차와 간극이 모두 극복되는 순간, 사건은 해결된다. <헤어질 결심>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시차와 간극이 모두 극복되는 순간 찾아온다.
또 하나의 시차, 혹은 간극은 해준과 서래 사이의 간극이다. 해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래와 사랑에 빠진다. 사건의 용의자인 서래와의 시차를 줄이기 위해 그녀를 한참 바라보던 시선은 그녀를 이해하고 알아가기 위한 시선과 뒤섞인다. 박찬욱 감독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장면에서조차 두 사람의 시선이 엇갈리도록 치밀하게 연출했다. 가령 취조실 장면을 살펴보면 취조실의 반투명 거울을 통해 장면이 전경과 후경으로 나뉘어있고, 해준이 말할 때는 후경의 해준에 초점을 잡고, 서래가 말할 때는 전경의 서래에 초점을 잡는 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을 엇갈려 놓는다. 또 그러는 반면 취조실 밖의 화면에 나오는 두 사람의 얼굴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처럼 마주 보는 방향이 아닌 서로 반대방향을 바라보게 되어있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이해하기 위해 들여다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 시선의 엇갈림, 시차를 극복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해준이 서래를 사랑하는 일은 엇갈림과 시차를 극복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시건을 해결하기 위해 수사를 진행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극 중 해준의 아내 정안은 "당신은 폭력과 살인사건 없이는 행복하지 않잖아!" 같은 말을 내뱉는다. 해준이 폭력과 살인사건을 뒤쫓는 태도와 사랑을 뒤쫓는 태도는 다르지 않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잠복해 망원경으로 서래를 바라보던 해준이 상상 속에서 서래의 공간으로 들어가 그곳을 둘러보는 장면이 있다. 이 일은 수사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해준이 이를 통해 서래에게 빠져든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망원경과 그것이 바라보는 대상 사이의 거리는 곧 심리적 거리와 상응한다. 서래의 외조부가 독립운동가였음을 확인하며 두 사람이 가까워졌을 때, 취조실에는 환한 빛이 새어 들어온다. 그렇게 가까워지다가 완전히 포개지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사랑의 끝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차가 완전히 극복되었을 때, 해준은 서래를 완전히 사랑하게 되었고, 동시에 서래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면서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을 했을 때, 당신의 사랑은 끝이 나게 되었고, 당신의 사랑이 끝이 나자,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시차와 간극의 아이러니. 영원히 극복될 수 없는 차이의 비극. 혹은 영원한 불일치. 마주 보고 있는 순간에도 두 사람의 시선은 엇갈려 있었고, 어쩌면 두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이기에 이 간극과 시차는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또 다른 헤어질 결심. 다시 마지막 장면으로. 서래는 해준과 포개질 수 없음을 해준보다 먼저 깨닫고, 차라리 해준이 영원히 좁힐 수 없는, 영원히 뒤쫓는 간극이 되기로 한다. 서래는 사랑한다는 마음과 "사랑한다"라는 말이 완전히 포개질 수 없음을 먼저 깨닫는다. 아무리 손에 담으려고 해도 손 틈을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것. 기표와 기의 사이의 간극. 그것을 영영 극복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것에 파묻히기를 선택한다.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와 물속에 빈틈없이 파묻히는 서래. 해준은 또다시 한발 늦었다. 서래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비행기. 그리고 바로 뒤이어 해준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비행기. 두 사람 사이의 그 짧은 시차가 두 사람 사이를 영영 갈라놓는다. 아니, 갈라놓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짧은 시차, 찰나의 간격을 극복할 수 없음은 해준이 영영 서래를 뒤쫓게 만든다. 포개지는 순간, 해결되는 순간 모든 것은 다시 비극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서래는 스스로 끝없이 가까워지려 하지만 가까워질 수 없는 미결 사건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불일치의 비극. 이제는 영화 밖으로 빠져나와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무언가다. 영화에 대해 길지 않은 글을 통해 설명을 늘어놓아도, 영화를 한번 보는 것만 한 글이 될 수는 없다. 언어와 개념의 틀로 세계를 포착하려 한들 보여주는 것에 담긴 풍부함을 온전히 전달할 수는 없다. 어려운 철학자 이름을 가져올 것도 없이,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영화는 보여주는 예술이다. 무슨 말을 한들 보여주는 것에 가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는 한편, 보여주는 예술인 영화도 감독이 의도한 것과 그 안에 담긴 모든 진의를 전달할 수는 없다. 보여주는 것은 나일지라도 보는 것이 타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와 결코 동일해질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불일치의 비극은 비단 서래와 해준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의사소통에, 창작에, 행위에는 언제나 시차와 간극이 존재한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차연일 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이 모든 것을 불일치의 비극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그 말을 통해 지칭하고자 하는 것이 온전히 담기지 않는다. 이 글 역시 <헤어질 결심>에 대한 온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회의주의가 아니다. 사랑한다는 말과 사랑 사이의 간극을 깨닫고 서래를 찾아 바다를 뛰어다니는 해준의 모습을 다시 보자. 결코 영원히 닿을 수 없음에도 닿기 위해 애쓰는 것. 그 끝에 도달해 비로소 비극이 찾아왔지만, 그 끝에 도달하기까지 해준이 사랑했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파도는 세계가 빚어내는 거대한 간극이고, 해준의 움직임은 끝없이 그 간극에 저항하는 움직임이다. 불가능성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간극을 좁혀나가는 일. 그것이 세계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헤어질 결심>은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