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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 Apr 23. 2022

19. 아이의 첫 소풍

feat. 엄마의 젊은 날


#1. 소풍 도시락


결국 가족 모두가 코로나에 걸려 꼬미도 열흘 정도 유치원을 쉬어야 했다. 오랜만에 등원했던 어느 봄날, 아이의 가방에는 밀린 알림 쪽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식목일 즈음에는 물병에 식물 심기를 했었구나... 페트병을 보내달라고 하셨었네. 지금 보내도 될까? 4월에 생일인 친구들의 생일잔치도 했었나 보다. 꼬미가 함께 축하해 주지 못해서 아쉽네. 그래도 5월부터 잘 가면 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알림을 읽다가 '소풍' 글자 앞에서 시선이 멈췄다. '?'


비록 의젓한(?) 누나가 강제로(?)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기 냄새 가득한 철부지 망나니가 드디어 소풍을 갈 만큼 컸다는 사실에 괜히 가슴이 뭉클했다. 오랫동안 버스를 타도 괜찮을지, 화장실은 잘 처리할지, 선생님은 잘 따라다닐지... 첫 소풍이라고 생각하니 엄마의 걱정도 기대도 뭉게뭉게 커졌다.


그러다가 깨달은 '도시락'의 존재.

'응?? 나보고 도시락 싸라고???'


달력에 별표를 달고 나니 D-Day가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으로도 볼 수 있었다. '유치원 도시락' '유치원 소풍 도시락' '유치원 도시락 꾸미기' 등등 폭풍 검색을 하다가 엄마들의 찬란한 도시락 앞에서 기가 죽고, 나도 해보자! 의욕이 볼타 올랐다가, 하... 나는 똥손이야... 라며 좌절을 했다. 겨우 결론은 '아이가 먹을 만큼만 만들고 적당한 제품의 힘을 빌려 꾸며보자'로 내렸다.



실 참 별 것 없는데... 엄마도 소풍 도시락 싸기가 처음이라 참 서툴렀다. 그래도 아이는 행복해했고, 엄마의 걱정과 달리 소풍도 잘 다녀왔으며, 선생님이 꼬미 유부초밥도 하나 드셨다며 자랑(?)도 해 주었다.



#2. 도시락을 만들다 보니 떠오르던 그때 그 시절


그렇게 도시락을 만들겠다고 부엌에 서 있으려니 나의 어린 시절 - 엄마의 젊은 어느 날이 자꾸만 생각나서 괜히 눈물이 났다.


엄마가 새벽부터 싸 두었던 거대한(!) 김밥 더미들... 호일로 된 도시락에 김밥을 곱게 썰어 넣고 신문지로 싸서 그 위에 편지까지 남겨두었던 엄마의 도시락... 그날의 엄마 모습...


나보다도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던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해 냈는지. 나의 육아 단계가 한 단계씩 높아질 때마다 그 시절의 엄마를 떠올려보고 매번 도대체 어떻게 해내었나 싶다. 스마트폰으로 장보기도, 배달도, 정보검색도, 카톡으로 세상과 연결되기도 불가능했던 그 시절을 어떻게 버텨냈을까.


더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마의 엄마는 세탁기도 청소기도 없던 그 시절에,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아홉씩이나 낳고 길러냈는지... 아이고...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어야 철이 드는 것은 아닐 텐데... 나는 나밖에 모르던 부족한 사람이라 요즘에서야 조금씩 마음 넓어지는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소시지 문어가 식기 전에 치즈 눈과 입을 붙였다.



#3. 무기력과 엄마놀이


코로나 탓이었는지, 그 외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던 탓이었는지 나는 한동안 상당히 무기력했다.


머리는 작동하지 않았고 하루는 너무 길었다. 밤 9시가 되기도 전에 아이들을 재우며 내가 먼저 잠들었다. 내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부족하니 엄마놀이도 버겁기만 했다. 혼자 쉴 수 있는 시간이 절실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등원한 또미는 어린이집에 다시 적응해야 했고 여전히 하루 3시간 단계를 넘지 못했다. 두 아이를 각각 보내고 잠시 멍하게 있다가 아점을 먹고 (브런치라고 쓰면 뭔가 훌륭한 음식일 것 같으니) 밀린 청소와 설거지를 하면 끝나는 세 시간. 그렇게 하루를 또 꾸역꾸역.


그러던 어느 날 또미의 어린이집 선생님과 전화통화를 할 일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끊기 전에 덧붙이셨다.


"어머니, 또미는 가장 안정적인 애착형성을 보이는 아이예요. 이 시기에는 애착형성이 중요하잖아요. 발달 단계에 맞게 잘 성장하고 있고, 잘 놀고 잘 먹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이 말 한마디. 그런데 이 말 한마디가 나의 무기력을 깨뜨려 줄 줄이야. 정말 힘이 났다. 아이의 정서가 안정되었다는 말, 아이가 잘 먹고 잘 논다는 그 말이 이렇게 강력한 힘(?)을 주다니. 아, 엄마놀이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이(?) 나도 엄마구나 싶었다. 



원비와 약값을 다 해1,000원밖에 안 내는 우리 조산아. 소아과 선생님들이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주는 우리 둘째. 아장아장 걸어서 어린이집에 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생각했는데 무려 풀칠(!)도 하고 색연필로 색칠(!)도 하고 식물에 물 주기(!)도 하며 잘 지내고 있다 하니... 얼마나 고마운지... (+ 그런데 선생님 낮잠은 언제부터 재울까요??)


앞으로도 욕심부리지 않고 아이들 몸과 마음이 건강하기만을 바라며 키워야 할 텐데.

육아 단계 고도화에 따라 이것저것그것 더 바랄 내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다 싶다.


어쨌든 또미 덕분에 엄마놀이도, 나의 일상도 다시 에너지를 얻었다. 생각해보니 그 덕에 누나 도시락도 브런치에 오랜만에 글도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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