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 (집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 혼밥(혼자 밥먹기), 혼영(혼자영화보기) 같은 신조어들이 생겨나고 있다. 나는 이런 신조어들이 어딘가 이상했는데 당연한 것들에다가 굳이 새로운 이름이 붙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을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혼자’인 것에 익숙하지 않은 지 알 수 있다. 우리사회가 미덕이라고 여기는 ‘성격’과 ‘성향’들은 대게 인간의 에너지가 밖으로 향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화합, 조화, 양보, 배려 심지어는 희생까지. 이러한 미덕들은 끝없이 자기자신을 절제하고 검열하고 차선에 두도록 한다. 자시 자신을 평가하는 모든 기준이 타인과 사회로부터 나온다. 에리히 프롬은 특히 현대인은 자기자신과 마케팅 지향 관계에 있다고 정의한다. 스스로를 시장에 성공적으로 배치시켜 사회구성원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의 자존감은 사랑하고 생각하는 개별 인간으로서의 자기 활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역할에서 나온다. 사회 시스템에서 특정한 기능을 담당해야만 하는 사물이 되어버린 인간은 자아를 소유할 수 없다. 친절과 예의 관용 같은 인간적 특성들은 상품이 되며 인력시장에서 더 높은 가격을 받게 해주는 인성꾸러미의 차변 항목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본다는 것이 자신의 사회적 가치와 인정을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여기며,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무능력을 인정하는 꼴인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대학생인 나는 혼자인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사회생활을 싫어하거나 못하는건 아니다. 마음을 나눌수 있는 친구도 있고, 강의시간에 조별활동 조장도 맡아 하고 교수님 앞에서 발표도 곧 잘한다. 오히려 타인을 대함에 있어 겁이 없다. 새로운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먼저 다가가 안부를 무를 수 있다. 다만 내가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에너지를 얻지는 못한다. 내향적이라는 것과 내성적인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를 에너지가 내 안으로 흘러야 추진력이 생기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즉 역설적이게도 나를 가장 역동시키는 요인은 고독이다. 여기서 고독은 물리적으로 혼자 있는게 아니라 심리적으로 나에게만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혼자있는 것 만으로는 내 자신 안으로 완전히 파고들 수 없다. 어느정도의 외로움과 서글픔이 있어야만 그제서야 외부로부터 나를 완전히 차단시키고 보다 내 마음 깊히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하는 생각들의 주체와 객체는 모두 ‘나’다. 나는 나와의 충돌을 좋아한다. 다발적으로 피어나는 많은 생각들은 한결같지 않다. 한 주제에 대해서 내 감정들은 정반대일때도 많다. 보통 사람들은 이 감정의 충돌을 혼란스러움이라고 생각해 기피하며 어떤 한 상황에 대해 일관성 있는 감정을 느끼고 싶어한다. 안정적이며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일관성 있는 감정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은 본연의 감정을 이성으로 제어하고자 한다. 이성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리의 감정을 제어하기에 아주 효과적이다. 하지만 나와 에리히 프롬의 생각은 이와 완전히 다르다.
<역할과 자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개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중에서도 자립적인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자립적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더 나아가 위험한생각이다. 나는 느낀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원한다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이지 생각하는 사람이 나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에리히 프롬
우리는 보편적 사실(우리사회가 옳다고 주입하는 것)과 나의 생각을 일치시키기 위해 합리화를 한다. 하지만 이것을 합리화하는 생각들은 그 감정을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지어낸 것일 뿐이다. 그것들은 진짜 이유가 아닌 나중에 떠오른 생각이다. 주어진 상황을 근거로 스스로 의견을 형성했다고 착각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결심하는 것 대다수는 실제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외부에서 암시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결심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타인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때 사람은 내 인격을 소유한다는 감정을 느낀다. 그러면 나는 나의 소유물이 된다. 하지만 이는 자아의 경험이 아니다 여기서는 나의 자아는 소유물로서의 나의 인격에 집착하는 자아이다.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하면 모두가 완벽한 진짜 삶을 산다고 확신한다. 연출된 자아의 삶이 순조로울 수 없는 이유는 모든 것을 묵묵히 감수 하지 않는 우리 정신 덕분이다. 진짜 삶의 기본을 위반한 결과는 장애와 고통이다. 지루하고 무미건조하며 우울하고 공허하고 아무 의욕도 없다. 이런 자기 경험의 부정적 감정들을 추적해보면 무력감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력감은 자기 자신의 강인함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을수록 역력해진다.
에리히 프롬
공동체 안에서 살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사회가 부여한 역할들을 수행해야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진 이상 자식이라는 역할이 주어지며 학생, 고객, 직원, 부모 등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내가 감내하는 역할은 늘어만 간다. 우리는 순응주의자가 되었지만 스스로가 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착각속에서 산다. 이런 착각은 개인이 자신의 불안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자아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자아의 상실은 타인에게 순응해야 할 필요를 더욱 키웠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회의를 낳는다. 고민할수록 자신 존재감에 대한 불안이 커지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역할로 되돌아가고 만다. 물질만능주의가 낳은 인간성 상실은 결국 역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자아의 실현이라 믿게 만든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뜨거운 감자인 여성학과 페미니즘의 출현도 결국 자신의 역할에 대한 회의감과 자아를 잃은 상실감에서 촉발되었다고 생각된다. 최근까지도 남편은 '책임' 아내는 '희생' 이라는 가치를 떠앉고 살아야했다. 이제서야 역할에 충실한 것이 결코 자아실현이 아니며 자신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것이 '이기적'이라고 여겨졌던 사회분위기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것이다. 나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운동은 결국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자발성'을 사수하기 하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포로이며 진정한 자아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격을 부수어야 한다고 작가는 주장했다. 특히 사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집착해서는 안되며 창조적 응답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을 경험하도록 배워야한다고 강조했다. 에히리 프롬은 이 과정에서의 역설이란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고 있던 내가 진짜 내가 아님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판단할 때의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가 ‘자기 생각의 결과’ 즉 자기 행동의 결과인가하는 점이다 사고의 옳고 그름은 두번째 문제이다.
우리는 감정의 양극성에서 나오는 갈등과 긴장을 받아드리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은 갈등을 기피하는 현대사회의 경향과 완전히 반대된다. 아이들에게 최대한 갈등의 경험을 덜어주고 모든 것을 수월하게 해주는 것이 부모의 덕목이라 여겨진다. 윤리적 도덕적 규범들은 너무나도 견고해 현대인들이 새로운 양상의 갈등을 체험하긴 어렵다. 그러나 갈등은 해로운 것이라는 보편적 사실은 오류이다.
“갈등은 감탄의 원천이며 자신의 힘과 흔히 성격이라 부르는 것을 개발하는 원천이다. 타인과 사회와 더 나아가 자기 자신과의 갈등없이 수월하게 굴러가는 인간은 사물이다. 사물이 되어버려 모든 소망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감정이 차분해지는 인간은 자아를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갈등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심오하게 경험하여 이성뿐 아니라 감정으로도 수용해야한다. 단순히 갈등을 부인하고 지적하는 것은 진정한 갈등의 경험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
<자발성과 예술>
“자신의 자아를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우리는 자아실현이 사고 행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인격의 실현을 통해 모든 감정적 가능성과 지적 가능성이 활발하게 표현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가능성은 모두에게 깃들어 있지만 겉으로 표현하는 만큼만 실현된다 적극적 자유는 통합된 전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다
에리히 프롬
작가의 말을 요약하자면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자발성’을 갖춰야한다. 자발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작가는 자발성이란 고립이나 무기력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강제적 활동이 아닌 spontaneous이란 라틴어 어원 sponte뜻 그대로 자유의지를 뜻한다고 말한다. 활동은 어떤 것을 한다 라는 의미가 아니다. 활동이란 감정의 영역은 물론이고 지적 감각적 의지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지는 인간의 창의적 활동을 말한다. 자발성의 전제조건은 인격을 전체로 받아들이고 이성과 본성으로 나누지 않는 것에 있다. 인간이 자아의 본질적 부분들을 억압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에게 명료해질 때 삶의 다양한 영역을 근본적으로 통합시켰을 때에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자발성의 예시로 예술가들을 든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문득 떠오른 어린날의 기억이 있다. 6살 나는 양산의 성아유치원에 다녔다. 지하1층에 큰 강당이 있어 미술시간마다 친구들과 내려가 여러가지 활동을 했는데, 어느날 고흐의 자화상을 그리기를 했었다. 선생님이 아주 짧게 작품에 대해 설명 해주셨는데 너무나 충격적이였다. 대충 화가로서의 고민 때문에 스스로 귀를 잘랐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그림 속 고흐가 흰 붕대를 얼굴에 감고 있는거라고. 다시 생각해보니까 6살밖에 안먹은 애기들한테 왜 굳이 고흐의 자화상을 그리라고 한지 모르겠다. 그 때 나는 정말 열심히 그렸다. 선생님이 사인펜, 색연필, 크레파스, 물감등등 여러 재료 중에 맘에드는 것을 선택하게 해주셨는데 그때 유화의 질감과 가장 비슷한 크레파스를 골랐었다. 미술시간이 지나고도 혼자 남아서 끝까지 완성시켰다. 어찌나 몰입했던지 몸에 열이 나서 더웠던 것도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면 그 활동은 단순한 그림 그리기가 아니라 도대체 스스로 귀를 자른 사람의 감정과 고민이 무엇이었을까 헤아리게하는 시간이였다. 그 후에도 피카소의 우는여인을 그렸는데, 그때도 다른 친구들처럼 왜 저런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한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지? 라고 생각하기보단 저 우는 여자는 어떤 도대체 감정이길래 저런 표정으로 나타낸걸까? 생각했었다.
내가 이 일화를 꺼낸 이유는 내가 저 작품을 보고 느낀 감상이 예술가들의 자발성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예술가들을 동경해왔다. 나도 예술가가 되고 싶다 또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뮤즈가 되고 싶다 늘 바라왔다. 에리히 프롬이 예술가란 자발적으로 객관적인 수단을 사용해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것을 보고 내가 예술가들을 동경하던 이유를 찾게 되었다. 자신의 정제되지 않은 본연을 그림으로 나타내니 타자가 볼땐 그저 난해한 그림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다. 예술가는 자발성을 표현할 수단을 지닌 특권을 누리는 동시에 사회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성공한 예술가의 개성이나 자발성만 존중받고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미친놈 아니면 신경증 환자 취급을 받는다. 이때의 예술가는 혁명가와 비슷한 처지이다 성공한 혁명가는 정치인이 되지만 성공하지 못한 혁명가는 범죄자이다.
아주 옛날부터 우리는 예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왔다. 특히 오늘날 예술과 도덕의 관계는 뜨거운 감자이다. 미적가치가 도덕적 가치를 우선한다는 심미주의, 도덕적 가치와 미적가치는 독립적 영역이라는 자율성주의 그리고 예술은 도덕적 판단대상이라는 도덕주의로 요약할 수 있겠다. 고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달과 6펜스”에서 이러한 논의를 살펴볼 수 있다. 예술가의 도덕적 윤리적 결함이 과연 예술가의 ‘자발적인 광기’로서 용납되어 질 수 있는 것인가? 우리나라 작품인 “서편제”을 떠올려봐도 딸자식의 예술적 재능 극대화를 위해 눈을 멀게 한 아비가 과연 용서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섣불리 예, 아니오 로 답할 수 없다. 물론 이런 예술가는 극단적인 예시일 수 있겠지만 예술가들의 감정, 의지, 행동의 주체는 오직 예술가 그 자신 뿐 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보여준다. 또한 너무나도 견고해 논의대상이 되기 어려운 도덕, 윤리들을 두고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가치가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고찰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시점에서 도덕적 윤리적 결함과 예술가치를 구분하기 더 힘들게 만든 것은 예술의 상업화라 생각한다. 예술가의 자발성을 표현하기 위한 도덕적 파괴가 아닌 수용자를 자극시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회의 선을 넘는 일들이 허다 해졌다. 현대사회가 이렇게 더 악랄해지고 사람의 감정을 요동치는 방식으로 이윤을 얻으려 할 때, 자발성은 예술가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향유하는 가치로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마무리>
나는 내 자신을 애증한다. 너무나 사랑하는 동시에 너무나 밉다. 완벽하지 않고, 사회의 기준에서 최고가 되지못하고, 가족과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게으르고 나태한, 현실감각 없는 내가 밉지만 동시에 이렇게나 허점 많고 비합리적인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인지하고 내적으로 수많은 갈등과 화합을 끝없이 반복하며 애쓰는 내가 좋다. 나는 어릴 때 부터 밤에 그네타는 것을 참 좋아했다. 밤하늘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듯 내 감정도 위로 치솟았다 아래로 끝없이 떨어졌다. 누군가에겐 이런 감정의 충돌이 시간낭비이고 생산성 없는 망상이라고 치부하겠지만, 이 우주의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티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발악이라고 생각한다. 끝없이 나란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것.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인간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싶은 소망 사이를 항상 이리저리 온간다. 모든 탄생의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포기하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나며 엄마의 손을 놓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 즉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 만을 믿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에리히 프롬
예상치 못하게 보스턴에 왔고, 엄마의 추천으로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읽는 동안에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교차하며 충돌했고, 카페인이 잔뜩 든 커피 한잔을 옆에 두고 글을 쓰고 있다. 우연히 창가에 앉게 되어 다음 문장을 쓰기 전 생각을 다듬을 때 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했으며 다시 몰입하여 글을 써내려 간다. 무수한 우연과 자발성으로 가득한 '글을 쓰는 행위'는 사실 아무런 쓸모가 없다. 원고료를 받는 것도 아니며 취업할 때 스펙이 되지도 못한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발성을 통제되지 않은 충동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지만 자발성과 자발적 활동은 자유와 자기 존재의 특징이다. 우리 역사는 많은 우연과 가변적 요소에 시달렸겠지만 인간의 삶이 끈기 있게 자율성을 보일 경우에만 의미있게 비판적으로 진짜 삶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진짜 삶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진정으로 보기 시작하고 다시 감탄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경험하고 갈등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하건 중요한 것은 자력을 통해 자신과 현실을 인식하고 그에 응답하는 것이다.” 나는 이 행위가 ,나의 자발적 글쓰기가 어쩐지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일들의 도약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