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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향수집가 Mar 24. 2024

<패스트 라이브즈>_지나간 시간임을, 지나간 사랑임을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후기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를 보면서 부끄럽게도 영화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영화의 순간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하나같이 눈시울이 붉어진 관객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 영화를 온전히 영화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패스트 라이브즈>는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이자 유태오 배우의 주연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한국에서는 <파묘>, <웡카>와 같은 작품들과 겹치는 시기에 공개되며 안 좋은 대진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해외 영화계에서는 이 영화에 대한 극찬이 끊이지 않고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각본상을 받았으며, 제39회 선댄스영화제에서는 ‘올해의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약 80여 개나 되는 해외 영화상을 받았고, <패스트 라이브즈>를 두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아름다운 방식으로 미묘한 영화, 내 인생을 바꾼 영화’라고 극찬했다.

 

도파민에 중독된 현대 한국인들에게 있어 이 영화가 최애 영화가 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헤어진 연인이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재회하는 연애 프로그램과 온갖 막장 이야기가 뒤섞인 드라마에 익숙해졌으며, 빠르게 전환되는 화면과 이야기의 흐름에 익숙하다면 더더욱 그러리라.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서사는 매우 평온하고 고요하다. 마치 지나간 어릴 적과 놓쳐버린 기억을 훑어 내려가듯이. 그렇기에 그 지독하게 현실적인 서사와 카메라 앵글의 흐름은 자꾸만 잊어버린 척 묻어뒀던 지난 추억이 스며 나오게 만든다.


※ 본 콘텐츠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좌 :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한국 포스터 / 우 : 해성과 노라(나영), 그리고 노라의 남편이 만나는 영화의 첫 장면 ©한국 배급 CJ ENM


영화 <중경상림>을 연상시키는 바에서의 장면을 시작으로 <패스트 라이브즈>는 나영과 해성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나영은 24년 전,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갔다. 작가와 화가였던 부모님, 그리고 작가를 꿈꾸던 어린 나영의 말에 따르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영어권의 사람들이 주는 노벨상, 토니상과 같은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상을 받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영은 자신의 이름을 영어 이름 ‘노라’로 바꾸고 미국에서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가 한국을 떠나기 전, 그녀가 사랑하던 남자아이 해성이 있었다. 그러던 그 둘은 12년 만에 페이스북에서 서로를 찾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스포일러를 전하자면, 결국 둘의 사랑은 성사되지 못한다. 둘 사이에 있는 거리와 시간이라는 간격에도 불구하고 노라와 해성은 다시 서로를 좋아하기 시작하지만, 결국 그 간격은 그들 사이에 서운함과 두 번째 이별을 가져다준다. 그 두 번째 이별에서의 허망함을 채우려 둘은 각자 다른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고, 노라는 그렇게 만난 새로운 남자와 결혼까지 한다. 그리고 그렇게 또 1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영을 잊지 못한 해성이 그녀를 찾아 뉴욕으로 온다.


24년 전, 한국에서의 어린 두 사람과 24년 후, 시간이 흐르고 다시 만난 두 사람 ©한국 배급 CJ ENM


사랑은 처음에는 풋풋하다. 마치 막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아가는 어린아이들의 그것과 같이. 그러다 이 감정이 사랑임을 알아가는 과정에서는 세상에 이만큼 달콤한 것이 없다. 그러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감정도 나와 같을까 고민하며 애절해진다. 그리고 이내 서로의 감정에 대해 오해하고, 마음이 아파져 온다. 아, 이건 사랑이 아니라 짝사랑이었으려나.

 

24년 전, 한국에서의 나영과 해성의 사랑은 풋풋했다. 그렇기에 소중하고 아련했으며, 그때는 그것이 사랑인 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때의 그것은 정말 사랑같이 거창한 감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12년 전, 아직 온전히 미국인이 되지 못한 이민자로서의 나영과 그녀가 떠나간 한국에서 계속 살아온 해성이 화상 통화를 통해 나누던 감정은 달콤했다. 서로 자신이 가진 그 감정이 서로를 향한 사랑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를 위하기보다는 현재의 자신을 지키기에도 벅찼던 젊은 날의 둘은 서로에게 서운함을 품은 채 멀어져 간다.

 

그리고 마침내 둘은 마주한다. 아직도 지난 시간의 그 미묘한 감정을 그대로 품은 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둘 사이의 거리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는 많은 다른 언어에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 둘의 사이는 딱 거기까지.


떠나온 사람, 그리고 남겨진 사람 ©한국 배급 CJ ENM


2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나영은 노라가 되어 있었다. 미국인 남편을 만나 미국 시민권을 얻어 온전한 미국인, 노라가 되었다. 그녀에게 어린 날의 나영은 24년 전의 자신이 한국에 두고 온 누군가였다. 자기 자신을 떠나보내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언어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문화, 새로운 나라에 뛰어들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한국 이름을 뒤로하고 미국식 이름을 택했고, 24년이 흘러 이제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익숙해졌다. ‘노라’가 되어버린 그녀는 종종 어린 날의 자신이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택했고, ‘나영’은 현재를 살아가는 노라에게 있어 그녀의 전생이 되었다.

 

가슴 아프게도 해성에게 나영은 전생 따위가 아닌 현재의 삶이었다. 나영이 노라라는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나갔지만, 해성은 그녀가 떠나간 그곳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떠나는 날 마지막 순간까지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했지만, 뉴욕으로 자신을 만나러 오라며 투정 부리는 그때의 그녀에게도 미처 전하지 못했지만, 그는 계속 나영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좋은 남편과 새로운 삶을 함께함을 행복해하면서도 가슴 아파했다.

 

버리고 떠난 이와 남겨진 이, 엇갈린 두 사람의 인연 속에서 결국 둘의 사랑 이야기는 성사되지 못한다. 노라의 미국인 남편은 눈치 없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백인 남자 따위가 아니라 현재의 그녀를 만들어준, 현재의 그녀가 사랑하는 이었다. 만일 <패스트 라이브즈>가 노라가 과거에 놓친 사랑을 재회하여 현재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의 해성과 나영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였다면, 이 영화는 이처럼 현실적이고 뭉클하면서도 아름답지 않았으리라. 어찌 보면 비극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이기에 <패스트 라이브즈>의 여운은 잔잔하고도 길게 남는다.


어쩌면 그녀는 더 이상 나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해성도 알고 있었을지도 ©한국 배급 CJ ENM


“한국에는 ‘인연’이라는 말이 있어. 우리 인생에서의 만남은 육천 겁의 전생이 겹쳐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이야.”


마지막 인사를 하는 해성은 나영에게 “만약 지금이 우리의 전생이라면, 다음 생에서는 어떨까?”라며 묻는다. 이에 나영은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리고 해성은 “나도. 그때 보자”라는 답을 남기고 떠난다. 그렇게 이번 생에서의 둘의 인연은 여기까지임을,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차마 인식하고 싶지 않았던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 알게 된다. 이 인연은 이번 생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였음을.

 

 

‘Right person, wrong time.’ 외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잘 맞는 사람, 잘못된 타이밍’으로 번역할 수 있을 이 문장은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 만날 수 있다는 완벽한 사람을 잘못된 타이밍에서 만났다는 말이다. ‘좀 더 빨리 만났다면’ 혹은 ‘좀 더 좋은 상황에서 만났다면’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을 때 쓰는 말이다. 어쩌면 나영과 해성의 관계는 딱 이처럼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 둘이 온라인으로 다시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서로 조금 더 안정적일 때였다면, 만일 나영이 결혼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해성이 그녀를 만나러 갔다면, 만일 둘 중 한 명이라도 서로를 만나러 뉴욕이나 서울로 들렀다면, 어쩌면 둘의 사랑 이야기는 이번 생에서 이루어졌을지도. 그러면 어쩌면 둘은 뉴욕이나 서울에서 함께 살았을지도, 귀여운 아이도 함께 키웠을지도.

 

하지만 그것은 이미 현재의 삶을 이루기 위해 과거에 두고 와버린 어린 시절임을, 지나간 삶의 일부임을, 종종 그때가 그리워 눈시울이 붉어지더라도 이제는 보내줘야만 함을 안다. 과거를 위해 현재를 버릴 수는 없기에. 전생을 위해 현생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그것은 지나간 시간임을, 지나간 사랑이었음을.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2024)

감독  셀린 송

출연  그레타 리, 유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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