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보면,
문득 나의 삶 중 간간이 저질렀던 실수가 떠오른다.
완벽하고 싶은 삶이지만,
나도 모르게, 가끔은 알면서도 실수를 저지르고, 그 후에야 '내가 그때 왜 그랬지?'를 되뇌며 후회한다.
어느 날.
지하철 임산부석에는 절대 앉지 않던 나인데, 버스의 임산부석에 풀썩 앉고 말았다. 핑계를 대자면, 지하철과는 달리 버스의 임산부석은 비워두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나도 이에 동조하여 아침 이른 출근 시간 피곤한 몸을 핑크색 좌석에 구겨 넣고 만 것이다.
몇 정거장이 지난 후 한 여성이 내가 앉은 자리 옆에 섰는데, 문득 눈을 돌리다 여성의 가방에 달린 임산부 표식을 보고 말았다. 하필이면 내가 임산부석에 앉아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얼른 일어서야 했는데, 망설이다 일어서지 못했고, 임산부는 먼저 하차했고, 나는 '왜 그 자리에 앉았고, 왜 일어서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또 어느 날.
나는 직장에서 후배들에게도 말을 놓지 않고 예의를 차리는 편이었다.
한 모임에 참석해서 처음 보지만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무엇에 씌었는지 그 사람이 옆 부서의 후배라는 생각에 지배되었고, 첫인사부터 말을 놓았다. 대화 중 상대방의 얼굴은 경직되었고,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모임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직원조회를 해보니 나보다 1년 선배였다.
이런... 나는 그 선배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전화를 걸어 다른 후배와 착각해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백배 사죄하였다.
'평소에는 모든 후배에게 예의범절을 철저히 지키던 내가 그때는 왜 그랬을까?'라는 후회가 절로 되새겨진다.
또 또 어느 날.
큰 아이가 중학생 시절. 아이의 두발 상태를 살펴 덥수룩하면 "단정하게 이발을 하는 게 어때?"를 자주 이야기 했다. 나는 아이에게 귀가 보이고 뒷목이 시원하게 드러나는 머리카락이 짧고 단정한 형태를 강조했고, 아이는 이에 순응했다.
그날도 가족이 함께 거실에 앉아있다 큰아이를 바라보니 머리카락이 귀를 덮고 뒷머리도 길어 보여 "이발을 하는 게 어때?"라는 예의 그 문장을 내뱉었다.
그런데 늘 순응하던 아이가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며 외마디 소리를 뱉어내었다. "싫어요.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단정하게 이발하면 모범생 같다며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한단 말이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빠 말에 순응하여 단정하게 이발하던 큰아이는 다른 아이와 다른 이상한 머리모양으로 규정되어 같은 반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고 있었다 한다.
아이의 절규를 들었던 날 이후론 큰아이의 머리모양이며 옷매무새에 대한 잔소리를 끊어냈다. '내가 왜 아이의 어려움을 미리 알지 못하고, 어른만의 기준을 들이대며 아이를 힘들게 했을까?'를 혼이 나간 듯 중얼거리며.
사람이 살면서 이런저런 실수를 할 수 있지만 실수의 경험은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지 오래도록 잊고 있다가도 길을 걷다, 샤워를 하다,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있다, 불현듯 가슴에서 머리로 치솟는 '실수의 경험'이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내가 왜 그랬을까?'를 되뇌어보지만, 정신건강을 위해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지. 앞으로 남은 인생 살 동안 '실수의 경험'을 밑바탕 삼아 조금 더 완벽하게 살아보자'며 스스로를 토닥인다.
그리고 상상해 본다.
늙었지만, 나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상대의 마음과 사정을 이해하여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주는 멋있는 노인이 되어가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