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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태엽 Nov 15. 2024

그래비티 (2017)

붙잡지 않으면 영영 멀어질까 봐 두려웠다

라이언은 지구에서 삶의 의미를 잃고 우주로 도망친 과학자다. 그럼에도 여전히 편안하지 못해 라이언의 무전은 계속 그의 몸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소식을 들려준다.

영화는 어딘가 불안한 라이언, 여유로운 베테랑 우주비행사 맷을 보여주고 곧바로 전환점에 들어선다. 주연 인물의 특징을 드러냈으니 이제 출발하겠다는 것처럼, 러시아가 자국의 위성을 파괴하기 위해 쏜 미사일 때문에 발생한 파괴된 위성의 잔해가 라이언이 수리하던 허블 망원경을 덮친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드는 잔해에 동료 과학자 한 명이 사망하고 라이언은 아무것도 없는 우주 공간으로 크게 튕겨나간다. 뱅글뱅글 회전하는 라이언을 구한 건 제트팩을 이용해 날아온 맷이었다.

맷과 라이언은 서로를 줄로 연결하고 우주정거장으로 향한다. 라이언이 가진 산소는 위험할 정도로 줄어들고, 맷은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건다.


저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당신을 생각할 사람.

딸이 있었어요.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어요.

연락받았을 때는 운전 중이었죠. 그 뒤로 그것만 해요.


라이언이 정신을 붙잡게 도와주던 그 목소리의 주인 또한, 연료를 다해버린 제트팩 때문에 떠나보내게 된다.

라이언이 그와 연결된 끈을 잡았지만, 놓지 않으면 라이언까지 우주 저편으로 튕겨나가 함께 죽을 수 있었다. 맷은 줄을 끊는다.

“내가 잡고 있었어요. 잡고 있었는데…….”

라이언의 절망한 목소리가 울리고, 그때 맷은 말한다.

라이언, 놓을 줄도 알아야 해.


기억에도 중력이 있어서 인간을 끝없이 끌어당긴다. 커다랗고 슬픈 기억일수록 중력은 강해서, 인간을 당기다 못해 빨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기억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끈을 붙잡는 것도 인간이다.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중력에서 멀어지기 위해, 끈을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라이언. 놓을 줄도 알아야 해. 지금 억지로 잡은 줄을 놓아야 한다는 뜻도 되지만, 라이언을 현실에 살지 못하게 하는 과거 또한 놓아야 한다는 뜻도 된다.


맷은 멀어진다. 마치 자신이 네가 붙잡던 과거라는 듯 떠나간다. 라이언이 그를 붙잡을 방법은 없다. 라이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맷이 말한 대로 라이언은 해내야 할 일이 있다.

낮은 산소 농도와 이산화탄소 때문에 흐려진 정신을 붙잡고 우주정거장으로 들어간 라이언은 몸을 휘감은 우주복을 벗는다. 중력이 없는 에어록에 둥둥 뜬 그는 아직 완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듯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다. 주위를 휘감은 각종 호스와 끈은 마치 탯줄 같다. 그 뒤의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야속하리만치 밝고 아름다웠다.

애초에 라이언이 왜 우주로 갔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은, 우주에는 중력이 없기 때문이다.

라이언은 태생부터 아버지에게 부정당한다. 아들을 원했다는 말, 그리고 ‘라이언’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서 라이언은 한번 가벼워진다. 아마 누군가가 잡지 않으면 날아가 버릴 풍선 같은 라이언을 끈을 붙잡고 있던 건 딸이 아니었을까. 그런 딸까지 허무하게 잃은 뒤, 인간이 인간을 끌어당기는 힘, 일종의 ‘인력’을 완전히 잃은 게 아닐까. 자신을 끌어당겨줄 누구도 없다는 상실감. 풍선 라이언은 그는 땅에 발붙이고 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붙잡아줄 누구도 없는 그가 우주까지 떠밀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끈을 잡고 놓치는 장면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목표했던 소유스에 겨우 탑승하지만 야속하게도 엔진은 가동되지 않는다. 삶을 포기한 듯 시스템을 모두 꺼버리고 죽음을 준비하는 라이언의 눈앞에 꿈처럼 맷이 나타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당신의 선택이야.
계속 가기로 했으면 그 결심을 따라야지.
편하게 앉아서 드라이브를 즐겨.
두 발로 딱 버티고 제대로 살아가는 거야.
라이언. 집에 갈 시간이야.


그리고, 그건 정말 꿈이었다. 꿈에서 만난 맷이 했던 말은 라이언의 무의식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다시 눈을 뜬 라이언은 소유스 착륙 시 발생하는 역추진을 이용해 소유스를 움직이기로 한다. 맷을 생각하며 딸에게 전하고픈 말을 내뱉는 얼굴은 자신이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아주듯 점점 밝아진다. 털어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후련함이 가득하다. 참 늦게도 찾아온, 자신만이 이룩할 수 있는 이별이었다.

새로운 소유스에 옮겨 타고 지구로 출발한 라이언은 말한다.

어떻게 되든, 엄청난 여행일 거다. 난 준비됐다.


지구를 떠나 우주로 가는 게 아닌,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 여행이라고 했다. 이것은 위험한 착륙뿐만이 아니라, 땅에서 맞이할 새 삶이라는 여행을 향한 다짐이었다.


무엇도 자신을 끌어당기지 않는 우주를 떠다녔다. 한없이 가벼웠던 몸에, 기어코 찾아낸 삶의 의지로 충만한 마음의 무게가 더해지며 다시 땅 위에 안착하게 된다. 오롯이 혼자의 몸으로, 비틀거리지만 웃으면서 땅을 딛고 선다.

갓 태어나 걸음마를 시작하듯 느리게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 이 지구는 죽은 딸이 묻혀있던 벗어나고픈 땅에서 발 딛고 살아갈 터전으로 바뀌었다.

이제 목적지 없는 운전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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