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태엽 Dec 03. 2024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 (2017)

한재호에게 없는 것. 믿음, 소망, 사랑. 그러나 사랑이 생기자……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고쳐야 두 사람은 해피엔딩을 맞이했을까.’부터 생각했다.


멋있다기보단 간지 난다는 말이 어울리는 연출과 대사는 치즈보다 오뎅탕이 어울리는 소주 같았다.

경박스럽게까지 느껴지는 한재호의 웃음소리를 따라 낄낄거리며 영화를 보지만 사실 그 아래에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 한재호의 마음처럼 수많은 계산과 배신, 상대가 자신을 완전히 믿게 만들기 위한 유혹이 있다.


조현수는 신분을 숨긴 경찰이다. 감옥에 수감된 조폭 한재호에게 접근하기 위해 감옥에 들어갔다.

순조롭게 재호와 현수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다 싶을 때, 현수의 엄마는 뺑소니를 당해 사망한다. 장례식을 치러줄 사람은 현수밖에 없어 내보내달라 빌어도 현수를 감옥에 넣은 천 팀장은 네가 모범수가 아니라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로 현수의 부탁을 무시한다.

그때 현수를 내보내 준 건 재호였다. 가진 건 믿음 대신 불신, 소망 대신 욕망, 사랑 대신 무정함인 남자. 장례 비용까지 다 내어준 재호와 독대하던 현수는 재호의 과거를 듣게 된다. 재호를 가장 먼저 죽이려고 한 사람은 그의 부모님이라는 것.

그 말이 기폭제라도 된 것처럼 현수는 모든 벽을 허물고 다가간다. ‘형, 나 경찰이야.’ 현수는 쥐고 있던 유일한 패자 마지막 패를 까버린다. 고백하던 얼굴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 말갛고 축축했다.


그때 한재호의 표정은, 관객이 후반부 공개되는 뺑소니범을 사주한 게 한재호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현수가 경찰이라서 놀란 게 아니라, 그가 얼마나 사람을 쉽게 믿는 착한 ‘애’인지 알아버린 표정. 병갑이가 달리는 차 안에서 재호에게 어떻게 그 멍청한 애를 감았냐고 물어보자 한재호는 침묵하다가, ‘착해서 그래’라고 말한다. 착해서 그래, 우리랑은 다르게…. 그때 재호는 후반부 현수에게 했던 말, ‘끝까지 모르지 그랬어.’를 생각했지 않을까. 이 착한 애가, 끝까지 진실을 몰랐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실을 알아버린 조현수는 ‘살면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대부분 뒤통수에서 오게 돼 있거든.’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사람을 믿지 마라. 상황을 믿어야지, 상황을.’

사람 믿지 말고, 상황을 믿으라고. 재호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더 이상 패가 없는 조현수를 의심해 엘리베이터에서 강압적으로 몸을 수색하고, 진실을 알게 된 현수가 병갑이와 재호 사이를 이간질하자 무자비하게 병갑을 죽이고… 상황을 믿기 위해 현수의 엄마를 죽여버리고. 믿고 죽거나 믿지 않고 죽임 당하거나, 이분법적인 세계에서 살던 한재호는 이딴 선택밖에 할 줄 몰랐다.


근데 난 형 믿어요.


그때는 예상도 못 했을 테다. 이 착한 애를 진짜로 믿고 싶어질 거라고는. 약 다 팔고, 함께 떠나버리고 싶을 줄은.


한재호는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현수가 불러낸 폐건물로 들어간다. 억지로라도 현수를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려고 이렇게 사는’ 인생이 지겨워서.


지겹다 진짜. 이렇게 사는 게.
현수야. 갖고 있는 약 다 팔아버리고, 싹 접어버릴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서로를 믿으며, 뒤통수 따위 맞는 일 없이 살고 싶었을까. 그러나 찌푸린 얼굴은, 쏘지 못하는 총을 쥔 손은 그런 미래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음을 선명하게 알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믿고 싶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뒤였다.

‘지금 나 안 죽이면 니가 죽어.’

현수는 그래도 이 남자를 죽이고 싶지 않았을까. 자꾸만 한 수를 무른다. 계획대로 했다면 잡혀갔을 한재호에게 경찰이 깔려있다고 말해주고, 지금 나를 안 죽이면 니가 죽는다며 경고한다.

아니면 오히려 그의 손에 죽어버려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싶었을지도. 재호가 다시는 누구도 사랑할 수, 믿을 수 없게. 너의 그 잔혹한 본성을 따라서 배신자인 나를 죽이고 영원히 후회하라고.


마지막, 한재호는 결국 조현수의 손에 죽는다. 천 팀장이 몰던 차에 치여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조현수는 한재호의 숨통을 막는다. 미약한 몸부림 외에는 움직임이 없다. 숨을 내어준다. 한재호가 숨을 거두고 조현수는 몸을 일으킨다. 그의 얼굴은 차게 굳어있으나 막을 수 없이 뚝뚝 떨어지는 굵은 눈물은 한없이 애처롭다.


그렇게 ‘어디서부터 고쳐야 두 사람은 해피엔딩을 맞이하는가’를 생각하다 보면 자꾸만 과거로 가게 된다.

여기서 다른 행동을 했다면 달라졌을까? 아니. 여기서는? 아니? 여기서도? 아니.

다른 행동을 해도 다른 파국이 기다렸을 것 같다. 이건, 상황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재호의 일생은 불신으로 이루어져 있고, 누군가를 믿기 위해서는 증명이 필요하다. 조현수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한재호 입장에서 가장 믿을만한, 자신의 손에 설계된 상황에서 조현수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다.

그래서 하게 된 극단적인 선택이 그의 가족을 죽이는 것이었다. 같은 경찰조차 외면해 혼자가 돼버린 조현수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이 선택의 기반은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믿는다’는 것이고 이건 아주 어릴 적부터 만들어진 ‘부모가 자신을 죽이려고 함’에서 시작된 것이니… 두 사람이 해피엔딩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한재호의 일생의 전반이 바뀌어야 했을 것이다.

믿음 위에 사랑이 있을 거라곤, 그 한재호도 몰랐다. 그의 일생에 사랑이란 없었으므로.

빨간 스포츠카에 누워있는 조현수는 마치 눈을 뜬 채로 조현수의 손에 숨을 거둔 한재호와 다를 바 없이 죽은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와 연관된 사람의 일부가 죽는 것과 같다. 한재호는 조현수의 손에 죽었다. 오프닝부터 병갑이 ‘총은 죄책감이 없다’라고 했음에도 총알을 모두 소진하고 현수가 직접 손으로 죽인다. 한재호의 마지막 숨은 조현수의 손에서 흩어진 것이다.

그는 조현수가 믿은 유일한 남자였으니, 그때 조현수도 사실상 죽어버렸다. 그러니 희붐하게 밝아오는 새벽빛에 젖은 조현수의 얼굴이 시체 같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 밤, 조현수를 제외한 모두가 죽었나. 아니, 조현수가 손대지 않아도 죽어버렸을 한재호의 숨을 기어이 빼앗았을 때 조현수도 죽었다.



추신.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패배자뿐이라 누가 더 사랑했는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