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常한 可逆反應>TEXT로 본 李箱과 프랑스 女人 - 3
시(詩)<이상한 가역반응>에 대한 기존 평가들
시(詩) <이상한 가역반응>에 대한 기존 평가를 단행본을 위주로 정리하면, 임종국은 별도로 명기한바 없었던 듯하다. 이상에 관한 첫 고정된 이미지는 1968년 9월 발간된 임종국의 『이상전집』에 실린 조용만의 1956년 쓴 서문의 영향도 컸다고 생각한다. 그 시작은, ‘양백화, 이상과 구본웅 화백 등 일행이 곡마단패로 오해받기 십상이라고 자조적 웃음을 흩날리는’ 장면으로부터 이상의 외모에 대한 평으로 시작되고 있다.
" 그(이상)의 詩나 小說이 모든 在來의 法則과 規矩(규구)를 無視한 것은 이같은 法則과 規矩가 遵守하기에는 너무나 우습고 庸劣하기 때문이다. 우습고 庸劣하기 보다는 그같은 法則과 規矩를 준수하는 것은 그의 絢爛複雜(현란복잡)하고, 高度로 旋回하는 頭腦의 一部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叡智와 感受性과 想像力을, 그의 腦髓에 充滿되어 있는 極限의 모든 能力을, 遺憾없이 發揮하기 위하여서는, 不得已 또는 저절로, 그의 作品은 그같은 形式을 取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남이 自己를 輕蔑하지나 않을까 하고 自己가 먼저 남을 輕蔑하는체 하는, 그런 種類의 自己防衛의 姿勢이었다. 모든 稀有한 資質을 가진 天才가 그렇듯이 李箱은 孤獨한 사람이었다." (趙容萬)
‘이상한 가역반응’에 대한 해석은, “‘원과 직선의 만남‘, ‘문제시의 자리에 머무는 지적 수음의 난해성’”(고은,1974), “두 자아 결합의 갈등과 추구”(이어령,1978), “곧 여성과 남성의 성행위를 노래하며” (이승훈,1989), “자아로의, 개인적 지평으로의 도피”(양윤옥,1980) 등으로 평가되고 있다.
" 이상의 근대어가 만들어 낸 <이상異常한 가역可逆반응>은 그것의 우울한 실험성에도 불구하고 경이이기 때문이다. (19쪽/청하 한글판15쪽) <이상한 가역 반응>은 말할 것도 없이 이상 이디엄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고도의 작시 기능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끝내 이해시가 아니라 문제시의 자리에 머무는 지적 수음手淫의 난해성 안에 갇히고 만다. (185쪽/청하판 162쪽)…… 이 처녀작은 섹스시 연작시로서 그의 문학이 가장 현란한 서술 효율을 나타낼 때의 중심에 늘 자리잡고 있는 중심핵은 성 또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명석하게 알려 주고 있다. 우리는 이상 시의 첫 발표를 통해서 또 하나의 중요성을 이상과 같은 섹스시였다는 사실을 앞으로 간과 할 수 없다." (186쪽/청하판 163쪽) (고은)
" 약관 22세에 〈이상한 가역반응〉으로서 1930년에 이나라 신문학 개화기에 데뷔한 기인 이 상의 시는 어떻게 보면, 첫 출발부터 불안(不安)의 근원으로서 양가치의 문자화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상한 가역반응>의 가(可)․역(逆) 자체가 이미 양가치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 (김종은)
"李箱은 나와 아내로 상징되는 두개의 自我, 또는 「나」와 「남」의 두 개의 다른 존재가 결합하려고 하면서도 끝없이 可逆反應을 일으키는 갈등과 변질에 대한 추구하는 데 中心 과제가 있었다," (이어령)
"우리나라의 시인들 가운데 전통적인 작시법을 벗어나 새로운 수사법(묘사나 진술)을 획득한 사람들이 몇몇 있습니다. 그 대표적 시인이 李箱과 金洙暎입니다." (오규원)
"이 시는 원과 직선의 만남, 곧 여성과 남성의 성행위를 노래하며, 전체시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진다. 전반부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만남이 추상적으로 노래되고, 후반부에서는 같은 날 오후의 만남이 다소 구체적으로 노래된다." (이승훈)
"이는 모두 일본어 잡지에 발표한 日文詩이며, 수학과 기하학 용어와 외국어 알파벳이 유감없이 詩語에 위치로 뛰어든 암호문과 같은 시였다. 종래의 서정시의 여러 가지 소도구들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수학 법칙과 기하학의 기호들이 파괴된 統辭論 속에 암호의 격류처럼 끼어든다. 이것은 파괴자 혹은 내버려진 자, 세계를 상실한 자, 즉 異鄕人의 언어이다. 그러나 이 ‘암호의 격류’ 속엔 종래의 기법으로 시인들이 기를 쓰고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었던 실존의 비극성과 가혹한 자아 분열의 테마가 탐구되어져 있다." (김승희)
“箱의 정신 세계에는 <이상한 가역반응>이 이미 깊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현실로부터, 일반적 정황의 구질구질하고 치사스러운 초조감으로부터, 箱의 조숙한 홀로의 웃음은 자아로의, 개인적 지평으로의 도피를 서두르고 있었다. …… 그가 떠맡은 무거운 정황과 더불어 주어진 보호막 아래서의 그의 자의식은 적절한 감정의 대응을 하지 못하고 죄의식의 갈등으로 분열되면서, 보호의 흐릿한 막 안과 밖을 꿰뚫는 미만한 안일의 여유면과 막을 향한 상대적 냉소로부터 자기 폐쇄는 길러지고, 이어 현실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격리시키는 데 골몰하면서 유아적 천재로서의 권태의 자장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의 <맹렬한 절뚝발이의 세월>(종생기에서)은 이렇게 그 서막을 열게 된다.” (양윤옥)
전반적인 평가는 인공적인 언어로 남․녀의 만남, 개인적 지평으로의 도피 등으로 평가하며, 서구 모더니즘시를 표방한 것으로 보았다. 자연주의적 또는 낭만주의적 시어로서가 아니라, 일상 언어를 등장시켜 자신에 대한 관념적, 주지적 심리묘사를 통한 직업적 갈등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원본 텍스트의 중요성을 강조한 김주현은, “일문시 「이상한 가역반응(異常한 可逆反應)」은 계열시가 아니라 개별시”라고 주장했고, 텍스트에 충실할 때 건설적 논의가 이루어진다고 요청했다. 또한 “기하학적 정리인가, 문학인가-초기 일문시가 과연 가치있는가?”고 반문하며,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인식, 작품에 대한 면밀한 주석작업,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영민은 『이상 텍스트 연구』에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큰 관심과 새로운 접근에도 불구하고 이상 문학의 실체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사실”이라고 진단했다. 이상은 초기의 일본어 시들은 무언가를 숨기면서 자신이 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곳곳에 남긴 것은 아닐까? 소설로 전달하기 어려워, 시로 암호처럼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워본다.
“어째서 유독 이상은 ‘나=이상’을 깃발처럼 내세웠던 것일까.”(김윤식,1998년)에 대한 해답은, 누구에겐가 자신의 입장과 억울한 이야기를 전달해야,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알려줄 수 있으리란 생각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건축학 분야에서의 이상에 대한 연구
일제시대 건축연구에 관한 논문이나 저서들 중에는, 일제시대 초기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 박동진에 대한 연구이외에, 이상이나 이상 시(詩)자체에 대한 연구는 적은 편이다. 일제에 의한 건축사업 결과 등 다양한 내용에 대한 설명에 그치고 있다. 김정동, 윤인석의 연구는 초기 연구는 일반론에 대한 연구였다.
아마도 정인하의 이상의 초기 시(詩)에 나타난 ‘근대성’에 관한 논의가 최초일 것이다. “이상의 초기시에 나타난 한국근대건축의 ‘근대성’탐구”(정인하, 1999년)에서, 이상(李箱)의 초기 시에 건축적 담론들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한국근대건축사연구에 그들이 주요 주제로 채택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이상의 초기시를 한국 근대건축사 연구에 포함시킬 경우 기존의 한국 근대건축사 연구의 방법을 대폭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연구한 정인하는 결론을 아래와 같이 맺었다.
“먼저, 한국건축의 근대성을 일제시대 최초의 한국건축가인 박길룡과 박동진에게서 구 할 경우, 그들의 작품과 활동에서 서구 아방-가르드에게서 볼 수 있는 첨예한 근대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두 번째로 한국건축의 근대성을 김수근과 김중업 같은 1960년대 이후의 건축가들에게서 찾을 수 있으나, 이들은 시기적으로 근대건축과 너무 멀어져 있다.…… 그의 초기 시는 근대적 아방-가르드들이 가졌던 첨예한 근대의식과 정신세계를 담고 있다. 구체적인 현실을 순수한 시각적 기호로 해체하여 그것을 특유의 자의식으로 재조합 하려 하였다. 이것은 건축과 연관된 서구 아방-가르드들에게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 자본주의적 대도시의 탄생과 거기서 발생하는 충격과 소외감, 무기력함을 시로서 승화하였다. 그래서 이상의 초기 시들은 한국근대건축에서 공백처럼 비어있는 ‘근대성’을 조망하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본다.”
이에 비하여, 이금도, 서치상의 『조선총독부 발주 공사의 입찰방식과 일본청부업자의 수주독점 행태』에 보면, 1926년부터 1941년까지의 조선총독부 발주공사의 입찰방식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배타적인 방식으로 운용되었으며, 대부분 일본 건설청부업자가 이를 독점 수주하였다. 결론에서 조선총독부 발주 공사는 조선토목건축협회와 같은 이익단체와 초행정적 권력기구인 관방회계과가 회계법과 입찰방식 등을 통하여 일본 건설청부업체가 공사수주를 독점할 수 있는 제도적 발판을 마련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사들은 설계에서부터 공사발주, 입찰, 현장감독, 중간검사 및 준공검사, 관유재산 목록화 등 여러 분야에서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런 만큼 기술 분야의 최고책임자인 기사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이상은 조선총독부 건축기구 소속기사로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직원록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상(李箱)이 잡지『조선과건축』에 해외건축가로 소개되고 등장했고, 1930년대 일간지 신문에도 소개되고 등장한 프랑스(佛國) 르 꼬르뷔제(Le Corbusier)를 읽고, 그의 인테리어 파트너 페리앙을 살피는 동안, 조선총독부의 답답한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시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李箱)의 시대에 던지는 2010년 서울의 현대 건축가들의 질문은 ‘이상이 어떤 건축을 바라보아야 했고, 르 꼬르뷔제를 꿈 꿀 수 없는 당시 조선의 산업현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자문하는 질문이다. 이상이 느꼈을 시대적 답답함을 이해하게 된다. 건축계의 연구로서 이상의 시(詩) 자체에 대한 연구는 적은 편이다.
자세한 주석과 출처를 제공하지 못하니, 그 이상의 자료가 궁금한 분은 아래 자료를 참조하시가 바랍니다.
성인수,「<이상한 가역반응>텍스트로 본 李箱과 프랑스 여인」,『국어국문학』, 제160호, 445-4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