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컬처와 과학기술, 젠더 이슈를 가로지르는 아티스트
“생리 기계 (Menstruation Machine - Takashi’s Take)"는 누구나 생리를 체험할 수 있도록 고안된 웨어러블 디바이스다. 허리에 찰 수 있도록 고안된 이 기계는 생리 시 동반되는 하혈과 복통을 경험할 수 있는 장치들이 달려 있다. “타카시"라는 남성 캐릭터가 이 기계를 사용하는 이야기를 담은 뮤직비디오 형식의 작품은 2010년 유튜브에 공개되어, 일주일 만에 1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오늘 소개할 스푸트니코(Sputniko!)는 과학 기술과 미래, 젠더를 주제로 다양한 작업을 해온 아티스트 겸 디자이너다. 일본에서 태어나 영국, 미국 등 여러 나라를 무대로 활동 해왔고, 유튜브에 올린 뮤직비디오 형식의 독특한 작품들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수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후 디자인 및 아티스트 분야로 전향한 작가는 2013년에 미국의 매사추세츠 공대(MIT)에 Design Fiction Lab의 디렉터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했고, 이후 일본으로 옮겨 2019년부터 도쿄 미술대학 디자인과의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작가는 일본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남들과 다른 행동이나 언어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일례로, 일본에서 출간된 작가의 자서전에는 기린을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Giraffe”라고 발음했다가 아이들에게 이상하다며 놀림을 당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다수의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고, 작품 안에서도 사회적 통념과 차별적인 관행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드러난다.
수학자인 부모님들의 영향으로 자신도 수학자가 되고 싶어 영국의 Imperial College London에 입학하여 수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지만, 작가는 졸업 후 음악과 디자인, 아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어 Royal College of Art (RCA)의 석사 과정에 진학한다. 2000년도 당시 RCA에는 디자이너 듀오 Dunne & Raby가 이끄는 Design Interactions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과학 기술과 미래에 대해 비판적인 접근방식을 취하는 스페큘러티브 디자인 (Speculative Design) 작업으로 많이 알려진 곳이었다. 작가는 졸업작품으로 “생리 기계" 뮤직비디오를 유튜브에 공개하고 아티스트로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작가는 이 작품을 만든 동기에 대해 과학 기술과 문명의 발전으로 인간이 우주에 가고 스마트폰을 쓰는 시대에 여성이 왜 여전히 생리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고, 만약 생리가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된다면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하게 될까를 상상해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경구 피임약이 1999년 일본 보건부의 승인을 받는 데까지 9년이란 시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작품 설명에 덧붙인다.
생리는 단순히 피를 흘리는 생물학적 현상이기에 앞서, 여성의 임신-출산-피임 등 성적 자기 결정권과 깊이 연관된 주제기도 하다. 여성 스스로 배란과 생리를 제어하도록 해주는 경구 피임약은 1960년대 등장했는데, 일본 보건부의 허가를 받아 상용화되기까지 반대 의견들이 많았고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반면, 남성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는 신청 후 6개월 만에 승인을 받았다. 비아그라가 승인되었을 때 경구 피임약은 아직 허가가 나지 않은 상태였고, 이에 대해 일본 의학계 여성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지자 3개월 후 경구 피임약도 허가를 받게 되었다.
1999년의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당시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경구 피임약이 대중화되면 여성들의 출산율이 떨어지거나 콘돔 사용이 저조해져 성병이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며 합법화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인류학자이자 일본의 Network for Women and Health 단체의 주요 일원인 히로코 하라(Hiroko Hara)는 경구 피임약의 승인이 비아그라와 달리 장기간 지체되어 온 건 젠더 문제이고, 일본 남성들이 일본 여성이 자율적인 권한을 갖는 것을 원치 않아서 그렇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참고로, 당시 일본 보건부의 204명의 직원 중 여성은 6명밖에 되지 않았다.
작가의 다른 작업인 “Tokyo Medical University For Rejected Women” 는 2018년에 밝혀진, 일본 도쿄대학 의대가 여학생들의 합격률을 떨어뜨리기 위해 10년 넘게 입학점수를 조작해온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작가는 토모미 니시자와(Tomomi Nishizawa)와의 콜라보를 통해, 도쿄대 의대로부터 불합격 처리당한 여학생들이 모여 일본 사회가 선호하는 남성 의사들을 만들어 낸다는 취지의 가상의 학교를 설립했다. 일본 도쿄대가 행해온 성차별을 풍자하는 성격을 띤 작품으로, 이 학교는 여학생들이 각종 최신 의학 기술과 드론을 사용해 남자 학생들을 의사로 변모시켜 병원까지 배달해주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홍보한다.
작가는 이 외에도 열정적인 소녀가 과학기술과 엔지니어링 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열망을 직접 실현하는 이야기를 담은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NASA의 엔지니어들과 협의하여 제작한 “The Moonwalk Machine - Selena's Step”은 달에 가고 싶은 한 소녀가 달에 하이힐 발자국을 남기기 위한 문 로버를 개발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Red Silk of Fate - Tamaki's Crush“는 한 대학원생이 첫눈에 반한 선배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소위 ‘사랑의 호르몬'으로 불리는 옥시토신을 자신의 DNA에서 추출한 후, 누에고치를 이용해 이 호르몬이 섞인 실을 만들어 선배를 유혹한다는 만화적인 상상력과 공상과학이 혼합된 작품이다. 인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이어져있다는 '운명의 붉은 실' 신화에 기반하여, 작가는 과학 기술을 이용해 신화를 재창조하게 된다면 벌어질 수 있는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 붉은 실의 실제 프로토타입을 제작하기 위해 작가는 일본의 국립 농림과학원(NIAS)과 협력하여 유전자가 조작된 누에고치를 배양해 옥시토신이 함유된 실크를 재배했다. 이 작품은 일본 나오시마의 테시마 섬에 위치한 Teshima 8 Million Lab에 신사 형태로도 설치되어 있다.
비디오 작품들에 사용된 신나는 배경음악은 모두 작가가 직접 불렀고 캐릭터로 작품에 출연하여 연기도 했다. 때문에 작품 속 작가의 다양한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감상 포인트 중 하나다. 여러 작품들을 통해 영향력을 인정받은 작가는 2019년 TED Fellow로 발탁이 되었고 World Economic Forum에서 선발한 Global Young Leader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Cradle이라는 여성을 위한 펨테크 스타트업을 창업해 사업가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2022년부터 서비스 런칭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상상의 영역을 넘어 현실의 문제 해결까지 활동 영역을 넓힌 작가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