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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Dec 28. 2024

157> 夜雨寄北(야우기북) / 밤비에 북으로 부치며

夜雨寄北(야우기북) / 밤비에 북으로 부치며

 - 李商隱(이상은)


問君歸期未有期

문군귀기미유기

●○○○●●◎

그대 돌아올 날 물어도 아직 기약을 못하네.


巴山夜雨漲秋池

파산야우창추지

○○●●●○◎

파산에 밤비 내려 가을 못물이 넘치는데.


何當共剪西窓燭

하당공전서창촉

○○●●○○●

언제쯤 서창에서 함께 촛불 심지 자를까?


卻話巴山夜雨時

각설파산야우시

●●○○●●◎

파산의 밤비 내리던 때를 나중에 얘기하자.

* 夜雨寄北(야우기북) : 밤비 오는데 북쪽 수도 장안에 있는 아내나 가족에게 글을 보내는 것이다. 홍매(洪邁)의 《萬首唐人絶句(만수당인절구)》에는 제목이 ‘夜雨寄內(야우기내)’로 되어 있어, 통상 아내 왕씨(王氏)에게 보내는 시로 알려졌다. 혹은 장안의 친구에게 보낸 시로 읽기도 한다. 시인은 당시 파촉(지금의 쓰촨성)에 있었고, 그의 친지들은 장안에 있었다.

* 歸期(귀기) : 집이나 고향으로 돌아 올 날짜.

* 巴山(파산) : 현재 섬서성(陝西省) 남부와 사천성(四川省)의 북동부 교차점에 있는 대파산(大巴山)‧소파산(小巴山)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시인이 있는 파촉(巴蜀) 지역 특히 동천(東川)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 何當(하당) : 직역하면 ‘미래의 어느 날을 맞아야’, ‘어느 날이 되어야’라는 뜻인데, 언제인지를 묻는 것이다.

* 剪西窓燭(전서창촉) : 서쪽 창에서 촛불의 심지를 가위로 자르는 것이다. 불에 탄 심지를 잘라내면 조명이 더 밝게 된다. 이것은 깊은 밤에 촛불을 켜고 길게 이야기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서창화우(西窓話雨)', '서창전촉(西窓剪烛)'은 사자성어로 부부뿐 아니라 친구 간의 그리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 卻話(각화) : 다시 ~ 를 말할 수 있을까?, 나중에 이야기하다.

君(군)은 指所寄之人也(지소기지인야)라. 未有歸期則與君(미유귀기즉여군)으로 豈能相聚(기능상취)리오. 山中夜雨(산중야우)에 水漲秋池(수창추지)하야. 情景凄涼(정경처량)이 更屬懷人之候(갱촉회인지후)라. 何當(하당)은 猶言何能(유언하능)이라. 夜深則剪燭(야심즉전촉)이니, 共剪西窓之燭(공전서창지촉)은 正是談心時候(정시담심시후)라. 以目下之落寞(이목하지락막)으로 作他時之佳話(작타시지가화)하야. 逆計其必有是境而又不知何日(역계기필유시경이우부지하일)에 始有是境也(시유시경야)라. 故(고)로 曰何當(왈하당)이라. 巴山(파산)은 一在四川保寧府通江縣(일재사천보령부통강현)하고, 一在漢中府(일재한중부)라.

君(군)은 부치는 그 당사자다. 돌아갈 기약이 아직 없으므로 그대와 어찌 서로 만날 수 있겠는가. 산중의 밤비에 가을 연못이 불어나 그 쓸쓸한 정경이 더욱 임 생각이 이어지는 때다. 何當(하당)은 어느 때를 당하여 이고, 何能(하능)은 언제 또는 어찌 가능하다는 것으로 비슷한 말이다. 밤이 깊으면 즉 촛불의 심지를 자르니, 함께 자르던 서창의 촛불은 바로 마음으로 말하던 때였다. 눈앞의 마음의 쓸쓸함으로 훗날의 아름다운 담화를 만들었다. 역으로 계산하여 반드시 이러한 경우가 있어야 하고, 또한 어느 날에 이런 경우가 시작될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고로, 何當(하당)이라고 말한 것이다. 파산은 하나는 사천 보령부 통강현에 있고, 하나는 한중부에 있다.

* 李商隱(이상은) : 813년 ~ 858년(추정), 자는 의산(義山)이고, 호는 옥계생(玉溪生), 번남생(樊南生)이다. 허난(河南) 싱양(滎陽) 출신이다. 조부 이보(李俌)는 후베이(湖北)성 징저우(邢州)의 녹사참군(彔事參軍)을 지냈으며, 부친 이사(李嗣)는 중시어사(中侍御史)를 맡았다. 이상은이 태어날 때 부친은 가현령(嘉縣令)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때부터 가세가 몰락했다. 이상은은 10세에 아버지 이사를 병으로 잃었고, 그와 어머니, 동생들은 허난의 고향으로 돌아왔고, 빈곤하게 생활하며 친척들의 도움에 의존해 살아갔다. 이상은은 장자로서 집안을 지탱하는 책임을 졌다. 25세에 令狐楚(영호초)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進士(진사)가 되고 校書郎(교서랑), 東天節度書記(동천절도서기), 檢校工部郎中(검교공부낭중) 등 높지 않은 벼슬을 역임했다. 영호초의 반대파인 王茂元(왕무원)의 사위가 되어 두 정파 사이를 내왕하여 절조를 비난받기도 했다. 그의 시는 서정적인 작품이 많고 修辭(수사)를 중히 여기어 정밀하고 화려하다고 하며, 典故(전고)를 많이 인용했다. 시를 지을 때는 참고 서적이 자리를 꽉 차지해 물개가 물고기를 늘어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당 나라 말기와 五代(오대)를 통하여 그의 시는 크게 유행했다. 溫庭均(온정균)과 함께 ‘온이(溫李)’로 불렸으며, 이들의 시파를 西崑體詩派(서곤체 시파)라 했다. 그는 일생을 불우하게 지냈지만, 杜甫(두보)의 전통을 이은 만당의 대표적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저서에 ‘義山詩集(의산시집 6권)’과 ‘西崑唱酬集(서곤창수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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