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은자의 거처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한 것이다. 성곽에서 쉴 적에 아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원숭이 소리가 애달픈 가운데에 사립문이 있으니, 쓸쓸히 한 마리 개가 도원에서 짖는 것이 곧 이 뜻이다. 푸른 강둑 흰 바위 가에 고기 잡고 땔나무 하는 작은 지름길이 있어서, 통행할 수 있는데, 해가 이미 석양으로 어두워질 즈음에 겨우 돌아오는데 비가 옷을 적실뿐이다. 윗 두 구는 은자를 찾는 뜻이고, 아래 두 구는 만나지 못하여 속상함을 말했다.
<이상은이 지은 같은 제목의 시가 한 수 더 있다.>
秋水悠悠浸墅扉(추수유유침서비) / 가을 물 그득히 차올라 사립문 젖은 집
夢中來數覺來稀(몽중래삭각래희) / 꿈속에는 자주 오고 깨서 온 적 드무네.
玄蟬去盡葉黃落(현선거진엽황락) / 가을 매미 다 가고 황엽은 떨어지는데
一樹冬青人未歸(일수동청인미귀) / 나무 하나 겨울도 푸른데 사람은 아직 안 오네.
* 李商隱(이상은) : 813년 ~ 858년(추정), 자는 의산(義山)이고, 호는 옥계생(玉溪生), 번남생(樊南生)이다. 허난(河南) 싱양(滎陽) 출신이다. 조부 이보(李俌)는 후베이(湖北)성 징저우(邢州)의 녹사참군(彔事參軍)을 지냈으며, 부친 이사(李嗣)는 중시어사(中侍御史)를 맡았다. 이상은이 태어날 때 부친은 가현령(嘉縣令)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때부터 가세가 몰락했다. 이상은은 10세에 아버지 이사를 병으로 잃었고, 그와 어머니, 동생들은 허난의 고향으로 돌아왔고, 빈곤하게 생활하며 친척들의 도움에 의존해 살아갔다. 이상은은 장자로서 집안을 지탱하는 책임을 졌다. 25세에 令狐楚(영호초)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進士(진사)가 되고 校書郎(교서랑), 東天節度書記(동천절도서기), 檢校工部郎中(검교공부낭중) 등 높지 않은 벼슬을 역임했다. 영호초의 반대파인 王茂元(왕무원)의 사위가 되어 두 정파 사이를 내왕하여 절조를 비난받기도 했다. 그의 시는 서정적인 작품이 많고 修辭(수사)를 중히 여기어 정밀하고 화려하다고 하며, 典故(전고)를 많이 인용했다. 시를 지을 때는 참고 서적이 자리를 꽉 차지해 물개가 물고기를 늘어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당 나라 말기와 五代(오대)를 통하여 그의 시는 크게 유행했다. 溫庭均(온정균)과 함께 ‘온이(溫李)’로 불렸으며, 이들의 시파를 西崑體詩派(서곤체 시파)라 했다. 그는 일생을 불우하게 지냈지만, 杜甫(두보)의 전통을 이은 만당의 대표적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저서에 ‘義山詩集(의산시집 6권)’과 ‘西崑唱酬集(서곤창수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