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엄마들 미쳤어. 저녁 늦게까지 애들 학원을 보내고."
얼마 전 아는 분께 들은 얘기다.
저녁 8시에 시작하는 성당 예비자 보충 교리 수업을 들으러 간 참이었다. 주일 오전에는 종종 규리와 함께 갔었는데 이번엔 오지 않은 것을 궁금해했다. 규리가 저녁에 학원이 하나 있어서 같이 못 왔다고 말했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학원 많이 안 다니고 단지 친구와 같이 다니려는데 시간이 저녁인 거라고 변명하고 있는 내 모습도 참 웃겼다. 점점 얘기가 길어지니 기분이 나빠졌다. 평소 나는 학원 안 보내는 엄마로 유명한데. 어느새 이런 얘기를 듣게 됐다니.
안 그래도 요즘 부쩍 바빠진 평일 일상에 의문이 들고 있긴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게 바쁘진 않았는데 올해부터 오후에 여유가 없어진 느낌이었다. 어제 규리와 얘기를 해봤다.
"내가 친구들이랑 놀고 오고 바이올린도 하고 영어도 하니까 당연히 바쁘지."
그래. 우리 딸이 많이 컸구나. 내 옆에만 껌딱지처럼 붙어있던 작은 꼬마가 어느덧 9살이 되어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늘어났다. 학원을 그렇게 거부하더니 배우고 싶다는 것도 생겼다. 바이올린과 클라이밍, 영어. 3개라고 해도 퐁당퐁당으로 수업이 있어 하루에 예체능 1, 영어 1이 규리의 오후 루틴이다. 바쁘긴 하지만 우린 부담이 없고 꼭 잘해야 한다는 불안함도 없다. 그냥 즐기는 수준이다. 과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 규리가 학원을 다니지 않을 때 4~5개씩 학원 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그 아이의 엄마를 비판하고 있었던 내가 생각났다. 아이가 불쌍하다고, 다 엄마 욕심에 애를 고생시키는 거라고 생각하던 내가 보였다. 맙소사. 내가 욕하던 사람들이 내가 되어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던 거다.
상처를 입히는 건 상대방이 아니라
무시하지 못하는 내 감정이다.
그분도 주변에서 들리는 얘기들로 '요즘 엄마들은~'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단번에 나를 '아이 학원 돌리는 엄마'로 만드신 거겠지. 그걸 무시하지 못하고 기분이 나빴던 건 내가 '학원 = 엄마의 욕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걸로 남도 판단하고 나도 판단했다. 마음속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나에게도 상처를 줬다. 사정도 다 모른 채 남을 판단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성당 안에서 ‘밤늦게까지 학원 돌리는 엄마’로 각인될까 걱정하며 사실을 말한 나를 원망했지만 굳이 그분에게 해명하지 않으려 한다. 그분의 말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를 만드는 것은 나여야만 한다. 다른 사람의 말에 나를 묶어두고 스스로 더 상처를 입히는 일은 이제 그만둘 거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그만해야겠다. 사실 의식적으로 하는 건 아니다. 나도 모르게 사람을 보면서 어느 순간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게 된다면 의식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할 거다. 그러다 보면 이 나쁜 버릇이 언젠가 사라지리라 믿는다.
기자 : 제가 프리먼 씨에게 '검둥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죠?
프리면 : 아무 일도 없어요.
기자 : 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거죠?
프리면 : 내가 당신에게 '멍청한 독일 암소'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기자 : 그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죠.
프리먼 : 그것 보세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기자 : 자기한테 한 말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이 비결인가요?
프리면 : 기자양반이 나를 '검둥이'라고 하면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는 당신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에요.
- '모건 프리먼' 인터뷰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