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기요시는 많은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나는 두 편을 보았다. 크리피와 스파이의 아내이다. 둘 다 좋았고 특히 스파이의 아내는 놀라운 걸작이다. 기요시는 마음을 그리는 예술가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에게는 마음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이는 감염이라는 모티브로 표현되기도 한다. 큐어는 어찌 보면 이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영화의 시작이 정신병원인 이유는 명확하다. 일본사회는 하나의 정신병동이라는 것.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상태의 일본사회의 공허와 공포를 이 영화는 목격한다.
첫 살인은 경쾌한 음악 속에서 등장한다. 후에 등장하는 여타의 다른 살인장면들처럼 카메라는 무심한 롱쇼트로 컷이나 움직임 없이 담았다. 이 영화 속 살인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그 안에 흐르고 있는 일상성이다. 클로즈업이나 화려한 카메라워크 없이 한 쇼트에 담긴 살인장면들은 평범한 일상적행위처럼 느껴진다. 다카베가 차를 타는 인서트숏 후에 영화는 다카베과 형사들 사이에 있는 장면들을 본다. 이 장면서 다카베는 그들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기요시는 넌지시 이 작품이 특정한 개인이 아닌 '평범한'인간들과 일본 사회에 대해서 질문한다는 것을 알린다.
마미야는 어떻게 등장하는가. 해변가의 롱숏과 롱테이크 속에 담긴 마미야는 익명성의 존재로, 신화화된 악으로 보인다.
프레임에서 나갔다가 들어오는 이 장면서 마미야는 공허하고 알 수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영화는 대화 장면을 일반적인 숏/리버스 숏으로 나누지 않고 담는 경우가 많다. 인물들의 블로킹과 길게 유지되는 호흡으로 구성되는 대화장면들은 미묘한 긴장감을 살리기 위한 선택인 동시에 살인장면의 일상적이고 건조함과 유사한 느낌을 전한다. 예컨데 이 영화에서 살인은 대화와 같은 일상적인 행위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모든 대화장면 아래에는 살의가 숨어져있다. 하지만 마미야가 최면을 걸 때에는 일반적인 숏/리버스 숏으로 전환하는데 이는 최면을 강조하는 의도의 연출이다.
큐어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은 종종 나오는 다카베의 일상이다. 오히려 강조되는 것은 다카베의 직업적인 특성보다는 일상인으로서 아내와 가지는 갈등과 내적인 고뇌다. 후에 마미야와의 대면서 드러나지만 그는 아내의 존재에 대해 애증과 분노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아마도 그가 죽였을 거라고 짐작되는)아내의 죽음이 납득된다. 다른 살인자들은 어떠한가. 이 연쇄살인사건의 특징은 아무런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사랑하는 아내를, 직장동료를, 길가다 마주친 사람을, 매춘부를 이유없이 살해했다. 하지만 다카베의 고백은 하나의 실마리를 준다. 짐작컨데 살인자들 각각에게는 살해해야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쿠마의 대사는 이를 암시한다.'최면으로 살인과 같은 금기를 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해'. 평범한 정상인들과 살인자들과 별 차이가 없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고 되기를 욕망한다. 라는 도발적인 메시지로 읽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정말 우리가 아는 인간은 그 인간이 맞는가? 알 수 없는 타인의 마음은 무엇인가? 등등이다.
마미야가 불을 최면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독특하다. 불은 빛의 근원지로써 주변을 밝히고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게한다. 마미야의 불은 인간이 추악한 본능을 마주하고 합일하게 만드는불이다. 마미야는 동시에 물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는 바닷가에서 등장하고 물을 통해서 공격한다. 기요시 영화에서 물은 파괴,붕괴와 연결된 소재였다. 이 영화에서 마미야는 선각자이고 전도사이다. 다만 그가 전도하는 것은 파괴적인 악이다. 그 악은 결국 일본,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일상을 잠식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