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에 대한 글쓰기는 매우 어릭석은 행동이다. 에드워드 양과 키아로스타미를 언어로 담을수 없는 것처럼 그의 영화는 부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기껏해야 영화가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만 적을 수 있으리라. 결국 이 글도 영원과 하루에 관한 글이 아니라 이 걸작이 나에게 무엇을 선물해주었는가를 설명하는 글이다.
영원과 하루는 롱테이크의 영화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롱테이크가 대다수다. 이 롱테이크는 1917 류의 경탄스러운(하지만의심스럽기도한)롱테이크와 다르다. 도대체 영화는 이토록 지루한 롱테이크를 왜 필요로 하는가. 나의 부족한 안목으로 추측하자면 먼저 그것이 마음과 기억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환상과 기억은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연결된다. 대표적으로 부두에서 해안가의 회상이 있다. 해안가에서 다시 현재의 부두로 돌아올 때 카메라는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그러면 해안가는 부두로 변해있다. 이 장면은 알렉산더를 아직까지 사로잡고 있는 원형적 기억을 현재와 분리시킬 수 없음을 편집없는 롱테이크로 시각화한다. 편집되지 않고 과거와환상을 오가는 알렉산더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롱테이크는 적합한 선택이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의 롱테이크는 시간을 인지시킨다. 부유하는 카메라는 몰입시킨다기보다는 지켜본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목도하는 것은 행위도 있지만 그보다는 행위가 담긴 시간이다. 롱테이크는 시간을 봉인하는 훌륭한 수단이였다. 커트없이 지속되는 장면은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래킹숏처럼 움직이는 카메라크는 시간을 시각화하는 움직임과 다르지 않다.
롱테이크를 채택함으로써 영화는 일반적인 대화구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숏/리버스 숏없이 한 프레임서 두 인물이 대화를나눈다. 그리고 영화는 클로즈업도 거의 없다. 이것 역시 아마도 앞의 이유들을 위해서이리라 추측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또다른 효과를 얻는데 관객에게 여백을 준다는 것이다. 영화는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관객에게 보여줄 뿐이다.
영화의 현재장면들은 거의 다 채도와 명도가 낮다. 어둑한 느낌과 질감의 화면은 화사한 빛의 과거 해변가와 대비된다. 더욱이 이를 강조하는 것은 검은 계열의 코트를 입은 알렉산더다. 현재모습 그대로 등장하는 그는 결국 이 장면들이 과거고 환상임을 깨닫게 만든다. 흥미로운 부분은 마피아에게서 아이를 구출하는 장면이다. 생각보다 강한 명암대비를 보여주고 인물들 대다수를 어둠이 덮고있는 장면은 그자체로 신화적인 느낌을 주며 알렉산더와 소년의 재회를 묘사한다. 종종 소년은 말도 없이 훌쩍 사라진다. 영화는 그 이유를 잘 모르는 듯 하다. 소년이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은 친구의 장례식이고 영화는 불빛이 일렁이는 소년의 얼굴을 향해 줌인한다. 영원과 하루에서 클로즈업에 가까운 쇼트들은 거의 다 줌인의 결과다.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그 마음을 향해 다가가는 시간을 편집하지 않는다.
영화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알렉산더와 소년의 포옹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 빛은 외로운 가로등 하나고 소년과 시인은.중앙이 아니라 화면 오른쪽에 있다. 프레임은 비어있고 어둡다. 삶이 그렇지 않은가. 그들의 따스한 우정조차도 삶의 고통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늦었지 않은가. 종종 인물을 찍는 롱숏은 시간 앞에 살아가는 인물의 무력함을 담아낸다. 대표적으로 버스에 내리는 두 인물을 담은 롱숏이.그렇다. 그 둘은 같이 있지만 너무나 작다.
영원과 하루는 죽음이 지배하고 있다. 알렉산더의 노쇠한 육체는 죽음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영화의 절정부분이 밤 중에 일어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서 인상적으로 반복되는 장면은 인물의 뒷모습이다. 특히인상적인 것은 엔딩이다. 환상 속에서 알렉산더는 안나와 재회하지만 안나는 떠나고 프레임에 알렉산더만이 홀로 남아있다. 그리고 영화는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으로 끝맺는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미래라기보다는 다가올 죽음이고 무상한 시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주했을 때의 표정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