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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onded Dec 05. 2022

아마겟돈 타임을 보고

Now let me take a trip down memory lane

Comin' outta Queensbridge

  

memory lane - nas



성장한다는 말은 매우 묘하다. 그 전과 달리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일텐데 도대체 그 좋은 사람이란 것이 무엇인가. 성장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을 볼 때마다 나를 당혹케하는 지점이 그것이다. 주인공의 변화를 과연 더 성장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성장보다는 변화를 믿고 사람은 늘 변한다고 믿는 입장이다. 하지만 성장서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복되어온 주제이다. 그리고 보통 그 배경은 십대다.

십대와 성장의 결합은 너무나 설득력-혹은 매혹-있는 것이기에 서사는 그것을 피할 수가 없다. 도대체 왜 이런 종류의 서사는 늘 주인공이 십대인가. 이유는 다들 제기할 것이다. 자기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고 독립심과 자의식이 강해지는 때이고 등등... 나에게 이 시기에 대해 부모의 울타리-나는 유년기에 이혼과 재혼을 겪은 집의 아이이기에 좀 다르지만-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마주한다고 말하고 싶다. 부모를 사랑하지만 존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택할 수 없는 가족 대신 선택할 수 있는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모두는 다른 세계(사람이든 무엇이든)를 대면한다. 다시 성장과 십대를 왜 서사는 사랑하는가. 그것은 특정 상황에 놓인 특정 인물이 하는 특정 선택과 변화를 다루기에 이토록 자연스러운 시기가 없기 때문이다. 일견 아마겟돈 타임도 그런 작품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평범한 감독이 아니고 이 작품도 그렇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작품이였고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라는 것, 현시대 가장 중요한 감독의 신작이고 그 감독의 전작이 애드 아스트라같은 걸작이라면 더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두번째는 아마도 알폰소 쿠아론의 걸작 로마 이후로 쏟아지기 시작한 자전적인 영화들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멀리 보자면 휴고까지 포함해서)페인 앤 글로리, 리코리쉬 피자, 로마, 신의 손, 벨파스트, 바르도, 그리고 스필버그의 더 파벤만스까지 최근에 소위 작가들의 자전적인 영화들이 쏟아지는 흐름은나중에 논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를 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핵심은 사건도 아니고 인물도 아니다. 세계 그 자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분위기다. 그레이의 인물묘사가 평면적이고 얕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들은 일종의 숙명적인 분위기에 지배당하고 있다. 때때로 그들조차도 그 분위기의 일부다. 아마겟돈 타임의 가장 큰 힘도 무드와 분위기에 있다.

 아마겟돈 타임은 제임스 그레이의 필모 중 가장 내밀하고 자전적인 영화다. 지금까지 그의 영화들에는 늘 그의 인생사와 가족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이 영화는 직접적으로 그의 세계에 들어간다.  그레이의 인물들에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이 부적응자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두 세계의 대립을 겪고 고통받는다. 폴 역시 이 부분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의 거장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찍은 자전적인 영화라는 측면서 이 영화는 제프 니콜스의 머드를 연상시킨다. 두 작품 역시 가족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나아가는 소년의 일화를다루고 있다. 이 두 작품이 공유하는 정서가 있다면 바로 상실감이다. 이들은 이른바 실낙원에서 살아가는 소년들로 하나의이상향에 대한 상상을 속에 가지고 있다. 세상은 그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앓게 된다.


영화는 화면을 보여주기 전에 소리만을 들려준다. 잃어버린 도시 z가 연상되는 이 오프닝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에게 이 장면은 마치 지금의 제임스 그레이가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하는 느낌을 준다. 공원을 비추는 짧은 숏 이후 영화는 교실을 비춘다. 교실을 비추는 쇼트서 우리는 폴을 찾을 수없다. 다음 영화는 폴의 뒷모습을 비춘다. 이런 등장방식이 드러내는 것은 폴의 연약함이다. 폴은 주인공이지만 그 많은 학생들이 있는 숏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가 연상되는 오프닝은 폴의 연약함을 암시한다. 그도 그들 중 하나일 뿐이다. 담임교사와의 갈등과 죠니와의 인연을 설정하는 장면은 교과서적이다. 프레이밍과 블로킹을 통해인물들의 심리를 표현한다. 누구와 함께 프레임에 있는 지를 통해 인물들의 마음을 시각화한다. 예로 죠니와 폴은 같은 프레임에 있지만 담임교사는 그러지 않는다. 제임스 그레이가 간결하고 정석적인 프레이밍을 자주 사용한다는 점 역시 이를도와준다. 인물들을 담을 때 그레이는 이 영화서 오버 더 숄더 숏보다는 싱글샷 위주의 연출을 보여주는데 이는 의미심장하다. 할아버지와 폴,폴과 죠니와 같이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이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결국 이 관계 역시 끝날 것임을, 서로에대한 애정과 신뢰에도 불구하고 서로는 다른 존재임을 표현한다. 이를 드러내는 연출이 아지트에서의 대화와 전학 간 학교에서의 대화, 마지막 이별장면이다. 아지트에서 둘은 싱글샷으로 잡히고 어둠이 그들의 얼굴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시댕디 어둠에 짓눌려있다 전학 간 학교에서 그들 사이에는 철창이 있는데 그들 사이의 계급적인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사회구조에 갇힌 인물들을 선명히 시각화한다.

아마겟돈 타임에서 컷은 느리고 상대적으로 움직임은 최소화되어있다. 그리고 화면은 정적이고 움직임은 느리다. 이런 카메라워크는 시종일관 폴이 나오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조적인 느낌이 든다. 실제로 영화는 폴의 시점보다는 어른이 된 제임스 그레이가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에 가깝다. 영화의 요소들은 제기되고 관찰된다. 이런 장면서 예외적으로 다가오는 순간들은  가족사를 들은 폴의 두려움을 묘사하는 장면, 자고 일어난 폴의 시점숏, 폴이 폭행당하는 장면들이다. 카메라가극렬히 흔들리는 핸드헬드는 폴이 폭행을 당하는 장면에 사용되었고 이는 효과적으로 폴의 공포를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강렬히 다가온 폴의 시점쇼트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듣는 순간이다. 희미하게 있다가 선명해지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남아있는 상처의 잔상을 포착한다.

 영화가 어른이 된 감독의 유년기에 대한 관조적인 회상에 가까운 구조이기에 눈에 띄는 장면은 두 가지다.

 첫번째는 할아버지가 사준 로켓을 쏘아올리는 장면이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숏을 고르라면 이것일텐데 여기 담긴 그 우울함과 상실감, 우아한 질감과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폴이 이해할 수 없는 작별인사 후 카메라는 차에서기다리는 어머니를 인서트숏으로 삽입한다. 그 다음 로켓을 날리는 폴과 벤치에 앉아있는 아론을 비추는 롱숏은 그 자체로 정서를 완벽히 표현한다. 다리우스 콘지의 재능이 발휘된 묘한 세피아톤의 질감은 1980년대 뉴욕의 노스탤지아를 담아낸다. 영화는 폴이 쏘아올린 로켓을 따라가지 않는다.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로켓은 상승했다가 하강한다. 영화에 추락은 있지만 정점은 없다.

 두번째 장면은 죠니와의 아지트에서의 대화 이후 죠니가 할머리를 회상하는 것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당시의 폴은 모르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첫번째는 그래서 감동적인데 그 당시 불가했던 상황을 이제야 알아차린 사람의 이해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짤막하게 삽입된어머니의 인서트숏은 그 시도다.

 두번째는 상당히 다르다. 그 부분은 나이든 제임스 그레이 역시 모른다. 순전히 상상인 이 장면이 왜 있는 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추측하자면 역시 상대적인 특권을 누리는 폴/작가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일 수 있고 과거를 회상하는 감독의 호기심일 수도 있다.


다르게 두드러지는 특징은 화면비이다. 가로가 긴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택했는데 인물 못지않게 환경을 강조한다. 예로 폴을 잡는 정면클로즈업은 좌우로 공간을 남겨 환경 역시 잡아낸다. 심도가 얕은 망원렌즈와의 결합은 폴 이외의 배경을 포커스아웃시킴으로써 폴이 느끼는 소외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시네마스코프 비율이 가지는 익스트림클로즈업의 효과 역시 영화는 잘 활용한다. 대표적으로 절도를 하기 전 폴의 눈을 찍은 클로즈업이 그렇다. 이런 부적응의 테마는 그레이의 작업물들을 관통한다.


영화에서 감동적인 쇼트는 폴이 할아버지의 부재를 확인하는 장면이다. 앞의 액자에 비친 뒤의 모습을 통해 환상임을 알게된다. 일반적인 구성이였다면 폴이 뒤돌아보는 장면을 넣었을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폴은 돌아보지 않는다. 그저 유리에 비친 희미한 이미지로 부재를 받아들일 뿐이다. 아마 할아버지로 대변되는 이상향이 유리에 비친 모습처럼 연약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영화는 폴이 거쳐간 공간들로부터 카메라가 멀어지는 연쇄적인 몽타주샷들을 선보인다. 이는 감독의 개인적인 작별이다. 그리고 폴은 학교를 나와 화면으로 멀어진다. 그는 한계를 상징했던 철장으로부터 벗어났고 본인의 길을 찾는다. 그리고 미래의 자신은 회상에서 어린 시절 본인을 놓아주었다.

영화는 소년의 성장담 아래에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심층으로 깔았다. 다만 이 주제는 이민자의 그것과 달리 서사와의 결합력이 약하고 주제가 튀어나와있다는 점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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