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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onded Jun 06. 2024

영화 10편

프리츠 랑 M


거인의 발자국이 남긴 질문들

프리츠 랑의 M에 대해서 논할 때 언급되는 단어들이 있다. 사운드와 화면의 편집, 표현주의적 양식, 사이코스릴러, 파시즘을 예견, 등등이다. 이것들은 맞는 말이고 그렇기에 우리의 사고를 멈추게 만든다. 프리츠 랑의 M은 단연코 걸작이다. 왜 아니겠는가. 빛과 어둠을 대조시키는 촬영과 사운드를 매개로하는 편집은 그 자체로 영화사에 각인되어있으며 피터 로리의 기념비적인 연기-얼굴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에 매혹된 이유는 이런 교과서적인 가치가 아니라 두 개의 장면 때문이다. 영화는 초반부 아이들을 담은 부감을 살인자가 쫓기는 장면에도 사용한다. 피해자인 아이들과 살인자를 동치시키는 이 숏들은 이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지점을 명확히 제시한다. 프리츠 랑은 여기서 도시의 시스템을, 그것을 빚어내는 인간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의 악은 악을 생산해내고 약자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도시 그 자체이다. 마지막 인민재판 장면서 대중들을 찍은 숏들은 이를 명백히 시각화한다. 프리츠 랑의 커리어는 여러 시선들을 받고 오해받고 있다. 그에게서 표현주의라는 이름을 꺼내는 자는 영화에 무지한 사람들이라는, 하스미의 의견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프리츠 랑이라는 거인을 어느 한 사조나 흐름에 고정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그의 미국 시절 역시 놀라운 성취로 가득차있기에 더더욱. 하지만 나에게 M이 랑의 대표작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이 영화가 가지는 윤리적 논리때문이다. 이것이 마부제 박사든, 빅 히트이든, 그의 작품 기저에 뿌리박혀 있는 태도를 설명해준다고, 동시에 나의 가치관을 정립해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존 포드의 젊은 날의 링컨



T.S.엘리엇은 언젠가 이런 말을 남겼다. "서양의 근대는 단테와 세익스피어로 양분되며 그 사이에 3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의 시비를 떠나 이런 선언이 가지는 명쾌함은 늘 매력적이다. 그리고 이 말을 영화에 적용하면 두 명의 이름으로 압축될 것이다. 히치콕과 존 포드. 누군가는 장 르누아르를 거론할 수 있고, 다른 거인들을 호명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내게 영화란 저 두 명으로 귀결되며 정의된다. 이 둘의 차이점을 (감히) 논해보자면 히치콕은 비인격적이고 전지적인 카메라였으며 존 포드는 인간적인 카메라였다고 말하고 싶다. 히치콕은 시점쇼트를 즐겨 사용했고 존 포드는 일인칭의 시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히치콕의 인상적인 장면들은 대체적으로 영화적인, 다시금 말해 비인간적인 시선이지만 존 포드의 영화는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히치콕은 영화가 만드는 영화이고 존 포드는 인간이 만드는 영화다. 그리고 젊은 링컨은, 그의 가장 시적이고 인간적인 영화다.

영화에서 아름다운 숏들을 열거해보자. 초반부 겨울의 얼음물로 이어지는 매치컷, 놀랍도록 아름답게 시간을 압축시키면서 시적 정취를 성취하며 동시에 상실을 표현해내는 이 장면을 나는 마술이라는 단어로만 표현할 수 있다. 혹은 헨리 폰다의 어색하면서 우아한, 대중에 섞이지 못하는 링컨을 묘사하는 몸짓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아니면 링컨이 속임수를 쓰는 장면의 의미에 대해 숙고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외의 수없이 경탄스러운 장면들을 다 포함해서 나에게 남아있는 단 하나의 이미지는 홀로 있는 링컨이다. 재판에서 이긴 후 링컨은 대중의 박수를 받지만 정작 그 박수를 보내는 대중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이는 관객이 링컨에게 보내는 박수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동시에 가장 빛나는 순간조차 링컨은 혼자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지해야한다. 다름이 아니라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반복되는 장면은 누군가를 보내고 홀로 남아있는 링컨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들은 우리를 우울과 고독, 슬픔으로 사로잡는다. 이 걸작을 통해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화된 링컨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링컨이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리고 여러 일들을 겪고도 상하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위엄이다. 그리고 이는 링컨만의 것이 아니다.





히치콕의 오명


알프레드 히치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영화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이 플라톤에 대한 주석이고 서양문학이 셰익스피어에 관한 주석이라면 영화는 히치콕과 그에 관한 주석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지나친 과장이라고 누군가는 지적할 테고 그 어떤 것도 하나의 이름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푸념할 수도 있다. 다 정당한 말이지만 히치콕이 이런 과장된 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감독이라는 사실만큼은 아니다. 그는 엔터테이너의 가면을 쓴 예술가였고 혹은 작가의 월계관을 삐딱하게 머리에 쓴 엔터테이너였다. 누구보다 대중적이였지만 누구보다 내밀했고 재미를 추구했지만 은밀히 인간과 영화에 대한 깊이를 성취했다. 그의 찬란한 성취들, 특히 50-60년은 아인슈타인이 과학을 변혁시킨 기적의 해에 비견될 수준이다. 하지만 내가 선정한 영화는 그 이전의 걸작이다.

오명은 완벽한 영화다. 너무 판에 박힌 표현이라고? 하지만 사실이다. 캐리 그랜트를 어두운 뒷모습으로만 표현하는 등장장면의 탁월함, 잉그리드 버그만이 결단을 내릴 때 그의 얼굴에 비치는 빛(히치콕은 종종 빛을 구원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악마적인 키스씬, 역사에 길이남을 세 대배우의 명연, 더없이 완벽한 엔딩...

버그만의 손에 있는 열쇠를 향한 전설적인 크레인 숏을 기억하는가? 이는 논평자로서의 카메라를 활용하는 히치콕의 위대함이 유감없이 발휘된 동시에 체스판같은 바닥과 부감으로 그 운명적인 감각을 시각화한다. 오명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 혹은 그들이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가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그 물음에 대해 답을 유보하며 끝을 낸다. 그 미묘한 긴장감과 유보야말로 히치콕의 정수 중 하나이면서 영화의 그것이기도 하다.

(세 인물의 관계변화를 담아내는 숏은 반복된다. 처음에는 캐리 그랜트가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버그만과 레인스를 지켜보지만 후반부 파티서는 레인스가 그들을 지켜본다. 첩보에서 사랑으로, 사랑에서 첩보로 변한 그들의 관계를 탁월히 묘사한 장면들이다.)


마담 드 막스 오푈스


막스 오푈스의 카메라워크는 마법이다. 그는 순전히 카메라만으로 복잡하고 달콤씁쓸한 감정을 담아내고야 만다. 마담 디는 희한하고 서글프고 아름다운 영화다. 다른 말로 오로지 막스 오푈스라는 사람만 만들 수 있다. 도나티가 마담 디를 대면하는 장면을 생각해보면 신비하다. 그는 관객으로부터 멀어져 창에 갇힌다. 그들의 운명적인 사랑은 로맨틱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처음부터 시간차를 두고 어긋나있다. 그리고 그들은 속박되어있다. 창에 갇힌 채 작아져있는 도나티의 숏은 이를 너무나 우아하게 시각화한다. 무도회의 아름다운 트래킹숏에 관해 논할 차례다. 그 시간을 압축해서 감정을 묘사하는 재능에는 탄복만 가능하다. 루비치 터치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오푈스 터치라는 표현 역시 그렇다. 찢어버린 편지가 눈으로 변하는 숏, 무도회 끝까지 남아 춤추는 연인을 비추는 숏, 그리고 무심히 보석을 보여주는 엔딩.. 영화는 어떻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가에 대한 정확한 답을 영화는 제시한다. 막스 오푈스는 정확하고 나는 이를 웨스 앤더슨과 폴 토마스 앤더슨에게서 본다. 감정은 영원할까. 카메라는 움직인다. 사람들을 따라가거나 남아있다. 하지만 카메라는, 아니 마음은 이미 거기에 없다.



로코와 그의 형제들 루카노 비스콘티


영화사의 위대한 이름들을 열거할 때 비스콘티는 영원히 거론될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걸작들을 남기고 자신들의 세계로 나아간 대가들을 떠올려본다. 펠리니, 로셀리니... 등등 고백하자면 나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을 혹은 8과 1/2의 위대함과 이 영화를 놓고 고민했다. 하지만 그 어떤 영화도 이 영화만큼 나를 뒤흔든 적은 없다. 비스콘티의 초창기 리얼리즘 영화든 레오파드로 대표되는 심미적이고 귀족적이며, 오페라적인 세계이든 다 매혹적이지만 이 영화는 그 사이에 있다. 비스콘티의 영화는 감정이라는 단어보다 정념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고 이 영화도 그렇다. 주세페 로투노의 섬세하고 경이로운 촬영과 니노 로타의 음악, 알랭 들롱의 연기와 전설적인 미모와 분위기가 빚어내는 파토스는 영화만이 가능한 그 무엇이다. 영화가 주로 사용한 딥포커스에 관해 말해보자. 영화는 전경, 중경, 후경에 포커스가 맞으며 이는 많은 인물들이 엮인 군상극인 영화의 이야기를 훌륭히 축조한다. 더 깊게 말하자면 영화는 늘 깊이감으로 차있고 중경과 후경에는 늘 무엇인가가 있다. 이는 인물들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시각화한다고 말해도 될 정도이다. 끔찍한 강간 후의 장면서 전경의 로코, 중경의 나디아, 후경의 시몬을 같이 포착한 숏은 그들 모두를 같이 담으면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담아낸다. 두오모 성당에서 이별을 포착하는 부감 역시 작은 인물들로 이를 정확히 시각화한다, 영화는 기차와 건물들을 통해 대각선의 구도를 만들고 활용한다.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애증으로 가득찬 싸움을 형제가 할 때, 엔딩서 루카가 걸어갈 때, 화면을 대각으로 지배하는 기차와 건물들에 비해 인물들은 너무 작다. 운명 앞의 인간들처럼.


천국과 지옥 구로사와 아키라

 

엘리엇이 한 말을 다시 되짚어볼 시간이다. 과연 제 3자는 없을까? 여러 이름들이 고려되겠지만 그 명단서 구로사와 아키라가 제외될 일은 없을 것이다. 종종 구로사와의 이름이 일부 사람들에게 폄하당하는 것을 본다. 스펙타클을 향유한 자들에 대한 불신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위대한 이름을 부정하려는 허영심이 읽히기도 한다. 그런 온갖 말들은 잊자. 구로사와 아키라는 당연히 위대한 이름이고 그를 비판하는 이들(하스미든 누구든)의 논쟁을 합친 것들보다 더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는 오즈만큼이나 펠리니만큼 나루세만큼 인간에 대한 깊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구로사와는 움직임과 구도의 대가이며 천국과 지옥은 이가 완벽히 발휘된 영화다. 납치소동을 다루는 1부에서 인물들이 삼각형을 이루고 기하적인 구도를 만들어내는 동선을 보라. 영화적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집단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을 시각화하는 블로킹을 지켜보다보면 영화는 진화하지 않는다는 말이 체감된다. 클로즈업을 사용하는 타이밍, 인물들의 움직임이 주는 아름다움까지 영화는 영화예술이 추구할 수 있는 미학의 끝자락까지 나아갔다. 영화의 핵심적인 장면들을 되짚어보자. 영화는 줄곧 롱숏 혹은 미디엄숏의 블로킹으로 대화장면을 연출한다. 유일한 예외는 곤도가 유괴범을 대면하는 장면이다. 전통적인 숏/리버스 숏의 구조로 연출된 대화장면에서 그들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있고 그렇기에 그들의 얼굴이 반사되어 겹친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위와 아래, 선과 악을 분리하지 않고 포개는 이 숏은 거대한 질문이다.

( 곤도가 윤리적 판단을 하기 전에 빛이 쏟아진다. 구원에 대한 훌륭한 메타포이다.)

 

암흑가의 세 사람들 장 피에르 멜빌

 

장 피에르 멜빌은 탁월한 스타일리스트고 그 자체로 하나의 대명사가 된 이름이다. 그의 영화들은 누구보다 확고한 개성을 영화사에 영원히 각인시켰다. 그리고 암흑가의 세 사람들은 이 스타일이 가장 선명히 빛나는 작품이다. 영화의 원제는 붉은 원이다. 그리고 이 제목이 더 적확하다. 세 인물들과 경감은 원으로 대표되는 운명의 이미지에 걸맞는 결말을 가지게 된다. 영화 초반부 당구대를 비추는 부감서 공은 세 개다. 명백히 세 개의 공은 주인공들을 비유하고 부감으로써 멜빌은 운명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모든 인간은 유죄다. 이 명제는 영화를 지배하는 문구이며 결국 하나의 예언이 된다. 그리고 이 말은 경감한테도 적용된다. 경감이 협박을 결심한 후 복도를 걸어가는 장면은 저 말을 곱씹게 만들고 그렇기에 동선도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한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27분 간의 절도 장면에 대해서는 덧붙일 말이 없다. 그 운동감과 리듬, 숏의 크기와 편집이 주는 아름다움을 멜빌보다 잘 구축하는 감독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없다.

 

플레이타임 자크 타티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은 기적같은 작품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다. 자크 타티의 터무니없이 거대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한 이 영화는 다시 나올 수 없는 미학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영화를 설명하는 많은 단어들이 서구권에 있고 그 어원들은 대체로 하나로 집약된다. 움직임. 영화가 만약에 움직임의 예술이라면 자크 타티의 영화는 그 극치이다. 이 영화에는 롱숏과 미더엄숏이 있고 클로즈업은 없다. 숏의 호흡은 길고 화면의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실제로 전경과 중경, 후경에는 늘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영화에 대해서 많은 이들의 도시의 기계화 인간의 소외 등을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영화의 일부다. 두 건물을 같이 잡는 앵글을 논하더라도 그들은 서로 소통불가능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같이 프레임에 존재한다. 영화의 미학적인 선택들을 이야기해보자면 딥포커스와 롱숏으로 표현하고자한 것은 명확하다. 영화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주고 관객들이 선택하고 만끽하게 한다. 영화는 그 모든 사람들과 행동이 가지는 가능성들을 모두 보여준다. 영화는 소외를 말하고 있지 않다. 만약 누군가 그것을 보았다면 그건 소외가 삶에 내포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모든 가능성들이 총체적으로 융화되어있는 삶을 담아낸다. 이 영화는 곧 인생이다.

 

성난 황소 마틴 스콜세지

 

마틴 스콜세지, 마이클 채프먼, 텔마 슌메이커, 폴 슈레이더, 로버트 드니로, 조 페시 그들 각자의 최고작은 같은 작품이다. 영화에서 마치 제의와도 같은 권투장면을 먼저 떠올려보자. 라모타는 상대를 바라보고 줌인트랙아웃으로 인해 소위 말하는 현기증 효과가 난다. 이 장면은 명확하다. 그는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을 갈구하고 있다. 그리고 링의 줄에 맺힌 피를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 숏은 압도적이다. 상대적으로 깊은 심도로 찍은 촬영이 마치 이 망원렌즈의 얕은 심도에 걸린 피를 위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라모타가 감옥에서 울부짖으며 자해하는 장면 역시 강렬하다. 강한 콘트라스트 대비와 마치 짐승같은 로버크 드니로의 몸연기가 결합된 숏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한다. 그가 아내를 만나는 장면에 그들 사이에 철조망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의 불화를 암시하며 가정에서의 폭력 후 권투장면으로 이어지는 편집은 그의 내면에서의 연결점을 시사한다. 엔딩서 라모타는 본인에게 그 대사를 뱉었을까 아님 동생에게 한 말일까. 나는 모르겠다. 영화는 그저 그가 떠난 자리를, 거울을 응시하고 있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에드워드 양

 

인간에게는 영화가 필요하다. 당신이 왜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그저 당신이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하나 그리고 둘은 시간이고 얼굴이고 거리감이며 빛과 어둠이며 삶 그 자체이다.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부정확하고 불성실한 태도이지만 고령가는 모든 장면들이 아름답다. 이 영화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너무나 연약한 존재들을 액자틀의 그림자로 시각화할 때 오는 그 슬픔을, 소년이 빛을 내는 전구를 깨트릴 때의 아픔을, 혹은 라디오를 듣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뭐라고 말해야할까. 이럴 때 언어는 부박하고 너절해서 불필요하다. 영화는 가까워지기보다는 멀어진다. 핵심적인 장면서 클로즈업이 아니라 롱숏을 사용한다. 영화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근사치로만 삶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앞의 질문을 다시 해보자. 왜 인간은 영화를 필요로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삶과 생존은 다르며 그 간극을 이 영화는 메운다. 우리는 이런 영화들이 있기에 살아간다. 하나 그리고 둘. 계속 이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 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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