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londed Jun 12.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포후기

위대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 라는 전언을 논리철학논고에 남겼다. 철학에 문외한인 나이지만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고 알고 있다. 철학의 모든 문제는 언어의 문제이며 형이상학적이나 미학적 논제는 논리와 언어로 해결할 수 없다. 언어라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동시에 그 한계는 어디에 있는가를 고심하게 하는 문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동창의 얼굴로 대표되는 나치즘이 패망한 후 브레히트는 이런 문구를 남겼다.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나무에 관한 대화가 그 많은 범죄행위에 대한 침묵을 내포하므로 거의 범죄처럼 되어버렸으니' 브레히트의 이 말은 홀로코스트, 혹은 그 끔찍한 죄악들 사이에서 무엇을 말해야하는가를 고민하게 한다. 하지만 보다 정확한 것은 첼란의 이 구절이다.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대화가 그 많은 말해진 것을 내포하므로 거의 범죄처럼 되어버렸으니.” 첼란의 말은 명확하고 핵심을 찌른다. 애당초 말한다는 게 무엇인가?


세르주 다네가 영화를 보지 않은 채 평론만 읽고도 진실임을 깨달았다는 글에서 자크 리베트는 천함과 윤리를 논한다. 요지는 아마 이미지의 도구화였을 것이다. 즉 아우슈비츠의 이미지(넓게 보면 폭력의 이미지, 더 넓게 말한다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윤리적 딜레마이다. 관객의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캐릭터(혹은 실제 사건)를 이용하는 행위, 동시에 관객은 그걸 보면서 본인이 안전하다는 자각에서 오는 안도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과연 윤리적인가. 애시당초 영화가 본다 라는 행위로 성립되는데 과연 이는 윤리적일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미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나아간 영화다. 도저히 내가 이 작품을 제대로 소화했는가가 의심스럽고 나의 무능하고 무지한 언어 탓에 실패할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이에 대한 감상을 적어볼까 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고 먼저 연상된 영화는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이다. 영화의 목표는 다르지만 본 영화는 타티와 닮아있다. 영화의 대부분 숏은 롱숏이며 거의 모든 화면의 피사체에 초점이 맞는다. 이런 촬영컨셉이 시각화하는 것은 이들 가족이 보이는 무심함이다. 후경에 배치된 건물과 감시탑, 벽은 선명하게 보이며 전경의 가족들과 함께한다. 하지만 가족은 벽 너머의 참극에 무감각하며 들리는 비명소리와 죽음의 소리들은 그들에게 자연의 소리와 마찬가지다. 동시에 영화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딥 포커스는 롱숏과 상대적으로 긴 쇼트길이와 맞물려 관객들이 화면의 구석구석을 보게 한다. 이로 인해 관객은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계속 상기해야한다.

 본작은 블로킹과 동선으로 직조된 움직임의 시네마이기도 하다. 인물들이 빚어내는 움직임과 빛의 결합은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영화가 거의 드물게 클로즈업을 사용하는데  가장 경악스러운 장면은 학살장면이다. 사방을 죽음의 소리가 가득 메우는데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 무덤덤함이다. 줄곧 롱숏을 사용하다가 등장한 클로즈업이기에 효과적으로 이를 전달한다.


저 클로즈업의 활용은 조나단 글레이저의 다른 선택을 강조한다. 이 영화는 수용소 내부의 폭력에 대한 시각적인 재현을 포기한다. 다른 표현으로 침묵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종류의 비극은 논리적 구조로 치환될 수 없고 말하는 순간 왜곡되며 도구화된다고 이 영화는 주장한다. 대신 사운드로 시종일관 관객들을 몰아세운다. 인공적이고 안정적인 내화면의 이미지는 외화면의 사운드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관객이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인지 인지하게 만든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문과 창문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가족들을 가둔다. 인물들은 종종 중경에 위치해있고 카메라 사이 전경에는 피사체가 존재한다. 이는 인물들의 둔감한 시야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들의 좁은 세계에 가두어져있다.

 가장 많이 반복되는 구도는 깊이를 강조한 상태로 찍은 복도이다.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이 구도는 관객의 시선을 인물들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만든다. 아닌 게 아니라 인물들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한나 아렌트는 사유하지 않음이 평범한 이들이 악을 자행하게 한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부부는 끊임없이 일하고 움직인다. 그리고 이 영화는 결정적인 장면서 이를 뒤집는다. 박물관서 반복된 구도는 원래라면 벽이 있었을 전시대를 관객들이 보게한다. 거기 쌓인 수많은 신발들을.



영화의 또다른 미학적 선택은 열화상카메라이다. 예컨데 회스 가족은 배경과 어우러져 있으며 때때로 배경이다. 하지만 폴란드 소녀를 잡은 촬영들에서 배경은 거의 죽어있고 인물이 형형히 강조된다. 그리고 이 존재는 영화의 모든 피사체들과 배치되는 선이다.


영화는 가해자를 다룬다. 그리고 그 태도와 거리를 되짚어보아야한다. 예컨데 회스 가족은 인간들로 보인다. 때때로 연쇄학살범이 아니라 성실한 공무원 가족이기도 하다. 드문드문 그들의 악한 모습이 보이나 그것은 인간적인 일의 범주에 들어간다. 도무지 600만을 도살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영화가 훌륭한 것은 가해자와 관객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예컨데 회스 가족은 인간으로 보일 정도로 가깝지만 개인으로 보이지는 않을 정도로 멀다. 영화의 악과 폭력이 개인적인 악행으로 축소되지 않으며 관객들까지 불러세우는 영화다. 이 영화는 그들이 무엇을 했나를 말하지만 우리가 그들과 무엇이 다른 지를 숙고하게도 한다. 즉 이 영화는 우리는 무슨 짓을 했고/하고 있으며/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영화다. 앞의 루돌프를 찍은 클로즈업은 정면이 아닌 숏이다. 덕분에 우리는 악한 개인이 아닌 인간을 응시한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10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