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때부터 오은영 박사의 방송과 서적들을 찾아보고 읽으며 훌륭하진 않더라도 괜찮은 엄마가 되어보고자 했었고 한 때는 방송으로 배운 육아와 훈육법으로 효과를 보기도 했다.
괜찮은 엄마의 반열에 오를까 싶던 그때, 아이가 나에게서 배운 예민함을 드디어 드러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불안과 폭력성까지 함께.
내 아이는 '예민하다'로 끝나지 않았다. 예민함이 극에 달하면 폭력성을 드러냈고 그 행동을 제지받으면 불안해했다.
끝도 없는 도돌이표. 좋은 엄마는 애초에 포기했지만 괜찮은 엄마도 되지 못한 좌절감, 티브이에서만 보던 문제 아이들의 행동을 내 아이에게서 보게 된 후 느낀 부정(不定), 한 살 더 먹으면 괜찮아질 거라는 합리화까지. 세상에서 가장 못난 감정들을 품 안에 꼭 지니고 다녔다. 무엇보다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느끼는 열패감이 가장 컸다. 아이의 문제에 대해 엄마가 가장 가지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모두 갖춘 나.
자존심을 내려놓기까지, 내 아이의 문제를 인정하기까지 나는 2년이나 걸렸다. 그리고 내가 보았던 육아서적들을 모두 한 곳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이 좋은 책에서 나는 배운 것이 없었다.
나는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직업에 종사했다. 대체로 그들이 필요한 것을 권해주거나 설명해 주는 일. 그러니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최소한만 듣고도 알아들어야 하는 것, 그게 내 일이었다.
남편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해왔다. 은행이나 편의점 등 ATM 기기에 현금을 채워 넣는 일, 건설현장에서 안전관리를 담당하는 것. 나와 달리 입씨름할 일이 많이 없었다.
큰 아이가 4살 때, 나와 남편이 세차장을 운영했었는데 그때 나와 남편이 손님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단 걸 알았다. 더운 날이면 몸이 지쳤고, 추우면 기계가 얼어버려 세차가 밀릴 때가 많았다. 항의가 들어올 때면 남편은 손님에게 하소연을 하는 편이었고 나는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편이었다. '죄송하다'는 전제는 같았지만 그 말을 풀어가는 형식이 전혀 달랐다.
손님은 나의 상황을 이해하지 않는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책정된 만큼의 값을 지불한 대가 안에는 손님의 시간과 만족도, 그리고 평가가 남는다. 만족도와 평가는 판이하게 다르다. 만족도가 높을지라도 평가가 모두 관대하진 않았다. 특히나 사장의 태도는 평가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데 세차상태에 대해 만족도가 높을지라도 평가 안에는 세차 상태와 더불어 그 가게의 분위기, 사장의 태도 등 전체적인 것이 담겼다.
얼마 전, 가게 안 에어컨이 고장 났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니 11평짜리 에어컨이 기름집 온도를 버텨낼 리가 없었다. 시원한 바람이 나왔다 안 나왔다를 반복했고, 찜통 같은 가게 안은 손님들의 불평이 들끓었다. 사설 에어컨업체도, 정식 A/S업체도 모두 일정이 되질 않고 새 에어컨을 설치한대도 수일을 기다려야 했다. 손님들은 우리의 사정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 특히나 이런 무더위에 이런저런 하소연은 손님에게 피로도와 불쾌감만 안긴다.
"죄송해요. 저희가 좀 더 부지런히 AS를 신청했어야 하는데, 너무 죄송합니다. 얼음물이라도 좀 드릴까요?"
이미 물릴 수 없는 주문이라 나갈 수도 없는 손님들에게 항 수 있는 최대한의 대책을 제안하는 것. 그게 나의 방식이고 남편은 손님에게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한다. 물론 마음 넓게 이해해 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사실 극히 드물다. 그리고 손님이 이 상황을 이해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남편의 방식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타이밍이 적절하지 않았다.
"저희가 에어컨 업체에 문의를 했는데 일정도 밀려있대고 새 에어컨도 설치가 당장 안 된다고 하니 저희도 진짜 난감하네요 허허."
남편이 사람 좋은 웃음을 하며 설명하지만 손님들의 표정에는 짜증이 서려있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건, 내가 지금 내 아이들에게 손님 대하듯 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 난 내 아이에게 오영은 박사가 하듯 나긋한 목소리로 "왜 화가 났어?" 물었을 때, 내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고 "때리는 건 나쁜 행동이야"라고 이야기해도 그때뿐이었다.
TV에서 보아온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아이에겐 전혀 통하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 떠올랐다. 내가 가장 친절해질 때는 '내 일'을 할 때였고 그것을 내 아이에게 대입해 보기로 한 것이다.
"불편하신 거 있으세요?"를 "우리 윤호 불편한 거 있어? 표정이 안 좋네?"로.
"필요한 거 있으세요?"를 "엄마가 해주거나 도와줄 게 있어?"로.
"친구를 때리는 일은 어떤 일이 된대도 허락되지 않아. 너도 억울한 부분이 있다면 엄마가 들어줄 순 있지만, 대신 너는 그게 잘못된 일이란 걸 분명히 반성하고 친구에게 사과해야 해." 최선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꼭 나긋한 말투가 아니라도, 억지로 마음을 꺼내 보이게 유도신문을 하지 않아도 내 아이는 바뀐 내 말투에 잘 대답해 주었다. 최근엔 아이의 사춘기가 시작되어 아이의 입을 떼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행동을 제어하기는 더더욱. 그러니 내가 잘할 수 있는 말투로, 내가 가장 오래 정착한 대화체로.
티브이로 보는 금쪽이들의 행동과 내 아이의 행동이 같다고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훈육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고, 심리치료와 ADHD에 대한 약물처방도 함께 받으며 나의 태도도 변화시키니 내 아이의 폭력성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나는 더 이상 그 어떤 일에도 열패감을 느끼지 않았다. 인정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나의 오랜 뿌리를 굳이 뽑지 않아도(말투나 목소리 등 오랜 습관) 대화의 변화만으로도 아이를 사랑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아이를 2학년때부터 지켜봐 주신 상담선생님과 학교의 선생님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아지는 아이의 태도에 가끔 물으신다. '어머니는 어떻게 윤호의 태도와 문제를 바꾸셨냐'라고, 어머님이 노력해 주시는 게 보여서 선생님들께서도 흥이 나신다고.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가끔씩 돌발적인 문제 행동을 하곤 한다. 물론 폭력성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이젠 아이의 문제만 지적하지 않고 아이의 말을 차분히 들어줄, 아이의 상처를 감싸줄, 아이의 행동에 조언해 줄 여유가 생겼다.
내 아이에겐 '손님처럼 대하라'는 육아법이 통했지만 다른 아이들에겐 듣지 않는 육아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엄마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다'는 말을 믿는다. 엄마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도 훌륭한 엄마가 되지 못했고 이젠 그 타이틀을 쫓지도 않는다. 나는 열심히, 최선이 아이라면 차선이라도 열심히 하는 엄마가 목표다.
너무 오랜만이죠? 지난 시월 마지막 글을 쓴 후 아이 육아법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했었는데 도저히 자신이 없더라고요. 나는 꽤 노력했고 아이의 행동도 많이 나아졌는데 내가 감히 이런 글을 쓰는 게 옳은 것인가 하고요. 아이가 완벽하게 ADHD를 극복한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심지어는 엄마인 저까지 성인 ADHD 진단을 받아 더더욱 고민이 많았습니다.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조금씩 풀어놓기로 했어요.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영영 결말이 없을 육아이라 '우린 이렇게 극복했어요'라는 말도 할 수 없지만 저와 제 아이의 고군분투를 공유해 볼까 합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들 중 제가 앞으로 이 글들은 적어 내려가며 마음먹을 다짐과도 같으니 가볍게 읽어주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