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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l 23. 2024

담론권력

지식과 권력

모리츠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 - <그림을 그리는 손>(1948)

  저 환자는 왜 환자로 규정될까? 저 그림 같지도 않은 작품은 왜 몇백억이나 되는 가격에 거래될까? 왜 내가 저 사람의 말에 복종해야 하는가? 세상에는 그냥 받아들이기 힘든 혹은 인식하기 힘든 사건들이 많다. 누가 봐도 멀쩡해 보이는 어느 한 사람은 의사라는 사람의 진단으로 인해서 환자가 되고, 고장나보이지 않는 멀쩡한 기기도 전문가가 이상이 있다 하면 바로 불량품이 된다. 그리고 공장에서 찍어낸 변기도 뒤샹이라는 예술가가 작품이라고 우기면 근대 미학에 큰 획을 긋는 대작이 되고, 비어있는 캔버스도 숭고라는 이론 하에 포스트 모더니즘을 대변하는 명작이 될 수 있다. 대체 어떤 요소가 작품과 사물을,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가르는 경계가 될까? 일단 그 요소는 사람일 것이다. 사람의 사유와 발화가 그 경계를 긋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인가? 어느 사람을 환자냐 정상인이냐 규정하는 사람은 의사일 것이며, 작품을 작품으로 감싸는 사람은 비평가 혹은 예술가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 특정 소수의 사람들이 그것들을 사회적으로, 공식적으로 규정하고, 판단하는 것인가? 그들이 권력을 쥐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권력은 어떻게 얻는 것이며, 왜 그들에게 주어졌는가?


지식과 권력

  권력과 지식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며, 지식 없는 권력의 행사는 불가능하고, 권력의 효과가 없는 지식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MM, 35). “어떤 사람이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비가 올 것 같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엽적인 의미밖에 없는 일상생활의 한 담화일 뿐이다. 그러나 기상청의 일기예보 담당자가 "내일 오전에는 비가 올 확률이 높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실성의 담론행위’가 된다. 개인적이거나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며 공식적인 담론은 서구문화의 여러 지식체계를 통해 점증적인 변화를 보여 왔고, 이러한 흐름에서 진실의 의지와 담론의 규칙성은 계속 공고해진 것이다(302-3).”

  니체가 지식의 문제를 권력의 문제로 환원시켰던 것처럼, 푸코는 지식의 생산과정이 필연적으로 권력관계에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지식-권력의 유기적 관계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다. 그 결과, 권력을 가진 자가 지식을 생산하고, 지식을 가진 자가 권력을 차지한다. 이 순환은 니체의 영겁회귀처럼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 결과 출발점이 같더라도, 초기에 지식이나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았던 자와의 사회적 간극은 지수함수꼴로 벌어질 것이며, 이는 곧 계층 간의 양극화로 이어진다.

  지식을 창출한 자는 권력을 얻고, 그 권력으로 다시 지식을 창출한다. 그리고 그 지식은 권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권력은 지식을 절대적 진리와 같이 만든다.


인식과 투쟁

  따라서 인식의 원천은 인식과 전혀 다른 것, 즉 욕망과 정념, 권력이다. 참/거짓(오류)의 분할 체계로서의 인식은 순수하고 ‘객관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인식 이전의 욕망들, 정념들, 바람들 간의 투쟁, 전쟁, 갈등, 협상, 지배의 결과이다(NF162). 지식 없이는 권력이 작동할 수 없음을 지식-권력의 연동체로 간주했던 푸코의 모든 저작이 실은 니체의 사상적 영향력 아래 있다고 볼 수 있다. 푸코에게 지식의 형성은 고정된 기원을 갖는 것이 아니라 투쟁과 힘들의 관계의 결과이다(FN,119-137).

  권력-지식의 논점은 권력 혹은 욕망과, 지식 혹은 진리의 분리를 주장한 플라톤의 관점과는 반대로 권력과 지식은 분리 불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권력과 무관한 지식도, 지식과 무관한 권력도 없다는 주장이다(HK, 337). 다른 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비시간적 본질을 갖는 초월적이거나 자연적인 실체가 아닌 특정 시공간 내에서 구성된 사회적,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지식의 형성과 주체의 형성. 몇 천년동안 자명하고, 절대적이라 여겨지던 이 두 본질은 투쟁의 결과물이었으며, 투쟁의 결과물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우린 이미 지식 혹은 권력의 생산자에게 예속되어 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법으로 그들에게 대항한다면 어떻게 이기겠는가. 그들의 사유로 그들을 배격하려 하는 건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따라서 다양한 관점과 시각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절대적 진리에 대한 변증법적 배격. 그것이 진리에 다가가는 과정이자 동시에, 주체성을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

 

마르크시스트 프레임

  푸코에 대한 가장 큰 오해를 하나 고르라면, 난 그가 마르크시스트라고 인식되는 것을 꼽고 싶다. 물론 그가 젊었을 때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의 스승인 알튀세르 또한 확실한 마르크시스트다. 하지만 푸코도 그렇다고 꼭 마르크시스트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는 당대에 대세던 마르크시즘과 현상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스스로 좌파임을 인정했지만, 그는 그 앞에 꼭 '니체적'을 붙였다. 니체적 좌파.

  푸코를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왜 그가 마르크시스트로 오해받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의 전기와 그에 대한 연구에서 나는 마르크시즘의 향기를 맡지 못했다. 오히려 난 니체의 체취를 느꼈다.

  그런데 담론권력을 말하는 푸코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 마르크시스트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겠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푸코의 텍스트를 직접 접하지 않은 이들에게 그는 그저 해체주의자이자, 니체의 영향을 받은 권력의 철학자이다. 하지만 그의 저서들과 그에 대한 연구를 많이 접해보면 오히려 '주체'라는 키워드가 푸코의 모든 사유를 관통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권력의 해체와 이항대립의 해체, 이성으로 대표되는 로고스 중심주의를 배격하는 그의 사유만을 피상적으로 접하면 그를 부르주아를 끌어내리려는 혁명적 마르크시스트로 오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시스트가 아니며, 오히려 철저한 니체주의자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다음이 아마 초기 푸코의 사유―정신의학과 담론권력―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간략한 문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결정의 권한은 다시 의학적 판단에 맡겨진다. 의학적 판단만이 광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의학적 판단에 근거해서만 정상인과 정신이상자, 범죄자와 책임을 질 수 없는 정신병자를 구별할 수 있다(HF, 232-3).”


Reference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이규현 역, 나남, 2020. (HF)

오생근, 『미셸 푸코와 현대성』, 나남, 2013. (MM)

정대훈, 「니체와 푸코 : 지식의 의지 개념의 조형 (푸코가 니체에게서 계승하지 않은 것)」, 『푸코와 철학자들』, 민음사, 2023. (NF)

도승연, 「푸코와 니체 : 힘에의 의지에서 지식-권력으로 (푸코의 니체 활용), 『푸코와 철학자들』, 민음사, 2023. (FN)

허경, 「미셸 푸꼬 : 우리 자신의 역사적, 비판적 존재론」,『현대프랑스철학사』, 창비, 2015. (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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