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경수 Oct 30. 2024

종이의 미래

About paper

카지미르 말레비치(Казимир Северинович Малевич, 1879~1935) - <흰색 위에 흰색 사각형>(1918)

최근에 오랜만에 은행에 갔더니 낯설었다. 계좌를 개설하거나 카드를 발급받으면 서명을 할 일이 많은데, 그 부분이 과거와 많이 다르더라. 은행은 종이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지류 서류가 아니라 태블릿의 터치스크린에 서명하는 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는 은행에 직접 방문해서 용무를 해결하는 거 자체가 어색해서 그런 걸 지도? 무언가를 쓴다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서명을 할 때 종이 위에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이제 구시대적 에피스테메에 속하는 지나간 담론에 불과한 것인가? 요즘은 책도 종이책이 아닌 e북이나 pdf 파일을 통해서 읽는다. 여러 권의 책을 들고 다니기에는 그 부피와 무게가 부담스럽기에 스크린을 통해서 독서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임은 분명하고, 보다 경제적인 선택일 것이다. 


인류세 시대 혹은 기후재난의 시대에 종이가 전자매체에게 헤게모니를 내주는 것은 환경학적으로 더 나은 혜안일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의 시대는 이제 끝이며, 그저 과거의 유산에 불과한 쓸모없는 말 그대로 '종이쪼가리'가 되어버린 것인가? 분명 지류보다 전자서류를 사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며, 경제적이다. 그건 종이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동의할 것이다. 종이는 육체를 가진 유한한 존재이지만, 파일(file)은 무한히 증식할 수 있으며, 업로드되어있다면 그 파일은 기기라는 육체에 종속받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일 것이다. 그럼에도 종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파일보다 영원할 수도 있겠다. 


인간은 더 이상 종이라는 매체에게 종속되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물리적 종이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매체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메모는 스마트폰에 하고, 결제는 종이화폐가 아니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카드를 통해서 한다. 독서는 e북 리더기나 다른 기기로도 할 수 있으며, 요즘은 영수증이 카톡이나 이메일로 오더라. 그만큼 우리는 종이라는 매체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다. 그럼에도 아직 우린 종이를 사용한다. 전자책이나 pdf파일이 책을 가지고 다니기에 더 가볍고, 부피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굳이 서점에서 책을 사고, 아직도 일부는 종이책을 읽는다. 그리고 유명인에게 사인을 받을 때도 우린 굳이 종이와 사인펜을 준비해 가고, 그것들을 이용해서 사인을 받는다.


종이는 분명 아직 우리 사회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도구이다. 많은 대체제가 있지만 아직 완전하게 그 역할을 다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도 전자매체가 더 편리해도 굳이 아날로그 종이를 더 선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제 종이란 생필품의 영역에서 사치품의 영역으로 그 자리를 옮겨갔다. 사치품이라는 것은 그 효과나 이용가치 이상으로 비용을 지불해서 구매한 것을 말하는데, 우리에게 종이가 사치품인 이유는 더 이상 그것이 경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최적의 공산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100만 원을 부모님께 용돈으로 드릴 때 우린 그냥 계좌이체라는 행위만으로 간편하게 송금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은행에 가서 출금을 하거나 그곳에서 송금하는 번거로움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뿐만 아니라 안전하다. 내가 만 원짜리 지폐를 100장 넣을 필요가 없으니 다시 금액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며, 송금한 만큼 그대로 상대방에게 입금되므로, 중간에 돈이 세는 것을 걱정할 필요 또한 없다. 

그리고 굳이 독서할 책을 가져가지 않아도 우린 휴대폰이나 태블릿 혹은 노트북으로 독서를 할 수 있다. 펼쳐서 봐야 하는 책과는 달리 앞의 기기들은 있는 있는 그대로 화면에 텍스트를 보여주며, 줌을 통해서 글자 크기도 조절하여 더 편하게 독서를 할 수 있다. 그리고 e북은 생산비용이 없기에 가격도 종이책보다 훨씬 저렴하다. A5크기의 300페이지의 책을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 우린 6인치의 아이폰을 들고 다는 게 더 편할 것이다. 책은 생필품이 아니겠지만, 스마트폰은 생필품이기에 우린 심지어 화장실을 갈 때에도 그것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린 왜 굳이 그 물리적, 경제적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왜 아직 종이를 사용할까? 그건 아마 종이가 주는 감성이 아직 디지털의 영역이 대신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펜을 이용해서 직접 손으로 종이에 편지를 쓰는 것과 굳이 현금으로 용돈을 주는 것 그리고 종이책으로 독서하는 것은 디지털이 대체하지 못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시각적 효과가 주는 정성과 확실성이다. 

펜으로 종이에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은 이 시대에 번거로운 것이 되어버렸다. 메시지나 카톡 하나 보내면 나는 상대방에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종이로 편지를 쓴다는 것은 많은 것을 요구한다. 일단 종이와 펜이라는 재료가 필요하며, 글씨를 쓸 때 밑에 받칠 책상과 같은 단단한 바닥도 필요하다. 그리고 재료만 있다고 편지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옛날엔 글씨를 또박또박 쓰는 것이 이빨로 음식을 씹어먹는 것과 같이 당연했는데, 요즘은 사람들이 키보드로만 글을 써서 글씨가 손글씨가 또박또박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따라서 손 편지는 카톡 하나 보내는 것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온전한 편지를 보내기 위해선 많은 선택과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요즘 시대에 손 편지는 낭만과 정성의 대명사가 되었다. 굳이 경제적, 물리적 비용을 지불하면서 까지 편지를 준다는 것은 많은 정성과 애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스마트폰시대에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용돈을 굳이 현금으로 주는 것은 왜일까? 증여세를 피하기 위한 탈세의 한 방법이라서? 그것도 하나의 이유일 수 있으나, 여기서는 잠시 접어두자. 굳이 왜 용돈을 송금이 아닌 현금으로 주는 이유는 휴대폰에 오는 푸시 알람 하나보다 더 많은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일단 100만 원이라는 금액을 준다고 가정했을 때, 은행 앱으로 송금을 하면 그 금액의 크기를 알고도 큰 감흥을 느끼기 어렵다. 왜냐하면 1억이나 천만 원이나 백만 원이나 5천 원과 같이 그냥 하나의 알림의 형태로 인지되기 때문이다. 물론 숫자의 자릿수가 주는 감흥은 다르겠지만, 결국 하나의 푸시 알림에 불과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현금으로 돈을 받으면 그 감흥이 다르다. 얼마 아닌 것 같은 금액도 지폐 수십 장으로 받으면 기존의 가치보다 더 큰 금액으로 느껴지며, 결국 비용대비 더 큰 감흥을 줄 수 있다.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용대비 더 큰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 비록 그 금액을 직접 출금하고 봉투에 담고, 그 돈을 잘 보관하는 수고가 필요하지만 효과는 송금보다 확실하다. 

그렇다면 책은 왜 종이책을 보는 것일까? 앞의 두 가지는 분명 상호소통과 관련이 있다. 종이에 손으로 편지를 씀으로 정성을 들였음을 드러낼 수 있으며, 현금으로 용돈을 줌으로써 상대에게 더 큰 감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독서는 혼자 하는 것이다. 독서의 수신자와 발신자 모두 동일한 인물인데 왜 굳이 종이책을 볼까? 

이건 시선에 의한 영향도 있을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내가 책을 본다면, 사람들은 내가 그냥 핸드폰을 보는구나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핸드폰으로 뭘 보는지 관심도 없다. 내가 게임을 하던, 유튜브를 보던, 인스타를 보던 그냥 핸드폰을 하는구나 할 것이다. 그러나 종이책을 본다면 나는 내가 독서를 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혼동을 주지 않고 내가 독서하는 것을 어필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그냥 종이를 본다고 생각하지 않고,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며, 내가 무슨 책을 읽는지 관심을 갖게 된다. 전자책 대신 종이책을 읽음으로써 이렇게 자신이 책을 읽는 지적인 교양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그저 디스플레이에 의한 눈의 피로감이 싫어서 굳이 종이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제 종이는 절대적 왕좌에서 내려왔다. 그럼에도 우린 종이를 무시하지 못하며, 인간 문명 밖으로 내쫓을 수 없다. 종이를 사용한다는 것은 구시대적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삭막한 시대에 없는 낭만과 정성으로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종이가 생필품이던 시절엔 그저 투명한 존재였다. 그저 글자가 쓰이는 혹은 그림이 그려지는 배경에 불과했다. 종이는 그야말로 수단으로써 인간과 함께 존재해 왔다. 하지만 이제 종이는 생필품이 아닌 사치품의 영역으로 그 자리를 옮겼다. 종이는 이제 예술작품과도 같은 자리를 차지하게 것이다. 굳이 없어도 생활에 불편은 없지만 여유가 있으면 추구하고 싶은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종이는 그저 그림이 그려지거나 글씨가 쓰이는 배경일뿐만 아니라 그 재질과 촉감으로 인해서 종이 안의 글자나 그림에도 큰 영향을 준다. 종이는 이제 콘텐츠의 시녀가 아니라 콘텐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비어있는 캔버스와 공책이 작품이라는 말은 아이러니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비어있음이 작품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작품이 된다고 말한다면 그건 아이러니하지 않을 것이다.


네이버 블로그


글쓴이 저서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작가의 이전글 김계환 : Made in Natur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