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의 계보 2
17세기 프랑스의 문필가 니콜라 부알로(Boileau-Despréaux)는 고대 수사학 전통에서 ‘숭고’를 다시 호출해 근대 문예비평의 유효한 범주로 부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가 롱기누스 『숭고에 관하여(Peri Hypsous)』를 프랑스어로 옮기며 전면에 내세운 것은 ‘숭고한 문체’의 규범이 아니라, 담론이 독자에게 행사하는 강도—독자를 “들어 올리고(enlève), 황홀케 하며(transport)” 사로잡는 효과—였다. 이때 숭고는 의미가 완결된 전달의 결과라기보다, 의미가 아직 봉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하는 정동적 사건으로 경험된다.
이 관점은 번역자 서문에서부터 명확히 선언된다. 부알로는 독자에게 “말 그대로의 충실성”만을 고집하는 ‘소극적 번역(version timide et scrupuleuse)’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단지 롱기누스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유용한 숭고론”을 공중에게 제공하려 한다고 밝힌다.¹ 이 대목은 숭고를 ‘정확한 의미의 이행’이 아니라 ‘작동하는 효과의 조직’으로 이해하겠다는 전제에 가깝다. 곧, 숭고는 정의를 소유하는 개념이 아니라, 독자의 감각과 사유를 특정 방식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의 양식이다.
부알로가 제시하는 정의는 그 전제를 더욱 단호하게 만든다. 그는 “숭고(sublime)”를 수사학자들이 말하는 “숭고한 문체(style sublime)”로 동일시하지 않고, 숭고를 “담론에서 충격적으로 발생하는 ‘비범함(extraordinaire)’과 ‘경이(marveilleux)’”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경이가 작품을 “들어 올리고(enlève), 낚아채며(ravit), 운반한다(transporte)”고 말한다.² 즉 숭고는 문체적 장엄함의 누적이 아니라, 독자에게 ‘붙잡힘’과 ‘이동’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이때 결정적인 것은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가가 아니라, 문장이 어떤 강도를 생산하는가이다.
이 지점에서 숭고의 조건은 ‘의미의 유예’라는 보다 엄밀한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의미가 즉각적으로 매끈하게 봉합되는 문장은 이해를 쉽게 만들 수는 있어도, 독자의 상상력과 감각이 개입할 여지를 빠르게 소진시킨다. 반대로 숭고는 의미가 완전히 고정되기 직전—해석이 미결 상태로 남아 있는 순간—에 더 강하게 출현한다. 여기서 ‘유예’는 단순한 모호함이나 결함이 아니라, 독자의 사유가 계속 작동하도록 만드는 적극적 장치다.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사이에 남는 ‘해석의 잉여’가 숭고의 강도를 지탱한다.
박정자는 바로 이 구조를 “표현을 감춘다”는 수사적 전략으로 정식화하며, 그 핵심을 “비확정성”이라 부른다. “표현을 감추었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즉 비확장적으로 남겨 두었다는 의미다. 문채든 아니든 수사적 비유들이 감춰져야 한다는 것은 가장 고급의 수사학적 기법이 비확정성이라는 것을 뜻한다.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대상을 지시하는 애매한 상태의 표현 방법, 결국 비확정성이 숭고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부알로는 결론지었다.”³ 그러나 이 “비확정성”은 본문에서 ‘의미의 방치’로 이해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의미가 과잉으로 닫히지 않도록 조율해, 독자의 상상력과 정동이 계속 개입할 수 있게 만드는 ‘결정의 지연’, 즉 ‘의미 유예’의 기술로 재해석될 수 있다. 부알로가 “숭고는 ‘큰 말’이 아니라 한 생각, 한 비유, 한 문장 회전에서도 발생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² 숭고는 장식의 총량이 아니라, 문장이 남기는 잉여의 배치에서 생긴다.
이 논리는 부알로의 시론에서도 규범적 문장으로 압축된다. 그는 『시학예술(L’Art poétique)』에서 “기교는 단순함 속에 있어야 하며, 숭고하되 오만하지 말라(Soyez simple avec art, / Sublime sans orgueil)”고 말한다.⁴ 숭고가 과장이나 화려한 언변의 결과가 아니라, 절제 속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단순함은 곧 ‘빈약함’이 아니라, 과잉 표지를 거두어들이는 절제의 형식이며, 그 절제가 남기는 미세한 불일치와 잉여가 독자를 “운반(transport)”하는 힘을 지속시킨다. 숭고는 명료한 질서의 완결이 아니라, 완결 직전에 남는 잉여—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채로 진동하는 순간—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진폭이다.
1. Nicolas Boileau, “Préface du traducteur,” in Traité du sublime ou du merveilleux dans le discours, traduit du grec de Longin (digital PDF, HITRADE/Università Ca’ Foscari Venezia), p. 7.
2. Ibid., p. 8. (“…Longin n’entend pas… le style sublime, mais cet extraordinaire et ce merveilleux… enlève, ravit, transporte…”)
3. 박정자, 『숭고 미학』, (서울: 기파랑, 2023), 28–29.
4. Nicolas Boileau, “L’Art poétique,” chant I, v. 101–102, in Œuvres poétiques (Paris: Imprimerie générale, 1872), p. 217.
Boileau, Nicolas. Traité du sublime ou du merveilleux dans le discours, traduit du grec de Longin. Digital PDF. HITRADE/Università Ca’ Foscari Venezia.
Boileau, Nicolas. Œuvres poétiques. Paris: Imprimerie générale, 1872.
박정자, 『숭고 미학』, 서울: 기파랑,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