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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May 26. 2022

02.자료수집, 좋은 재료를 고르듯



목표중심형 인간을 깨운 체크리스트


결혼을 하고 경력이 단절된 지 7년차가 되면서 내가 얼마나 목표지향적인 사람이었는지 잠시 잊어버렸었다.  

대략의 대목차를 만든 뒤, 읽어야 할 책 목록을 뽑아보니 60여 권 정도.  

제목과 작업 진행 상황을 기록하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요 작업까지 마무리 했을 때 둘째가 태어났다>


둘째가 예정일보다 훨씬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리스트에 있는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하고 병원에 가게 되었다. 출산을 하고 입원해있는데 저 체크리스트만 머릿속에 빙빙 돌았다.


나는 그 당시에 상당히.. 비장했다.


그도 그럴것이, 온전히 내가 책을 읽으면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조리원에 있는 2주, 정부산후도우미가 오는 2주, 이렇게 딱 한 달이라는 시간이었다.


그 뒤로는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첫째와 이제 막 태어난 둘째의 독박육아 라이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육아고 살림이고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책을 읽는 것은 앞으로 내 인생에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껴졌었다. 그래서 상당히 비장했다.


이 한 달 동안 어떻게든 나는 최대한 많은 책을 읽어야 했다.


무심결에 만든 체크리스트는 내 의지에 불을 붙였고,

오랫동안 잠재워있었던 내 안의 목표지향적 인간이 깨어났다.


회사를 다닐 때 목표가 있으면 물불없이, 밤낮없이 해치워서 워커홀릭에 완벽주의자였던 팀장님마저 '엄지척'을 했을 정도였는데 그 때의 그 인간을, 그 때의 나를, 나는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난 그 느낌이 좋았던 거 같다:)


책으로 태교하고 책으로 산후조리하고


조리원에 들어가는 날, 남편에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달라고 부탁했다.

첫째 때와 같은 조리원에 들어갔는데 코로나가 없던 그 때와는 조리원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그 때처럼 산모들끼리 모여서 수다를 떨지도 않았고, 밥도 같이 먹지 않았고, 요가같은 프로그램들도 없었다.


책읽기 아~~~주 최적화 된 분위기였다.

도넛 방석을 깔고 앉아서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 이미 대목차를 어느정도 짜놓은 상태라 어떤 내용이 필요한지 금방 캐치해낼 수 있었고 책을 다 읽으면 그 부분을 타이핑을 쳤다.


조리원에 있는 동안 그 고요함이 좋아 2주 내내 TV 한번 켜지 않고 책을 읽으며 거침없이 체크리스트를 채워나갔다.


집에 돌아와서도 남편이 당시에 집에 있었기 때문에 새벽 수유가 끝나고 잠시 쪽잠을 잔 뒤 정부산후관리사님이 오시면 바로 옷을 챙겨입고 도서관으로 갔다. 관리사님도 산모가 이렇게 바쁜 산모는 처음 봤다며 혀를 내두르셨다.


대망의 한 달이 지나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있는 책이 많아 신경이 쓰였지만

나의 사정과는 별개로 남편은 새벽 5시에 출근을 했고, 잠귀 밝은 첫째는 아빠 나가는 소리에 깼고,

3시간마다 수유를 해야 하는 둘째도 그 때 기상했다.

두 아이들과 새벽 5시에 하루를 시작하고, 나는 시댁이든 친정이든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책은 커녕 뭐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간절한 마음이 닿았는지 둘째가 생후 50일 무렵부터 새벽 수유를 하지 않고 통잠을 자기 시작했다. 슬슬 셋의 일상이 안정이 되자 내가 언제 짬을 내야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주로


첫째가 책읽기에 빠져있을 때! 이 땐 둘째를 아기띠를 하고 책을 읽었다.

두 아이를 동시에 낮잠 재우기에 성공했을 때!

둘 다 재우고 난 뒤 저녁!에 책을 읽었다.


이 시간동안 이사도 하고, 첫째를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보내며 적응시키고, 남편 이직에 뭐에 정신없이 보내다 결국 몸에 무리가되었는지 대상포진에 걸렸다.


책쓰기 전체 과정에서 이 시간이 가장 힘들고 가장 고되고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덜 힘들고, 그래서 덜 어려웠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내 머릿속이 온통 그 체크리스트에 빠져있으니 출산의 고통에도, 두 아이를 동시에 육아하게 되는 어려움에도, 이사에도, 이 밖에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감정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누가 산후우울증 이야기를 하면 나는 산후우울증에 걸릴 시간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녀교육서이나 양육 관련 된 책을 읽다보니 두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자체가 나에게는 의미있는 시간이었고, 자칫 덜 현명하게(?) 보낼 수 있었던 그 시간을 훨씬 의연하고 현명하게 지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마치 근사한 음식을 만들기 전에 좋은 재료를 선별하는 마음으로,

아주 멋드러지게 쓰여질 내 책을 기대하며 주옥같은 자료들을 모았다.


이 전에 읽은 책, 이 기간 동안 읽은 책, 책을 읽으며 체크리스트에 추가 된 책까지 합쳐서

총 120여 권 정도 읽고 본격적으로 책쓰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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