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변하면 아이도 변할 텐데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럽다고 한다. 막상 돌이켜보면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외국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어 부럽다는 말을 들으면,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고, 입이 있으나 말하지 못했던 초라했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뿌리째 뽑혀서 다른 곳에 심어진 기억은 차갑다. 친구들은 사진첩에, 집은 종이 박스에 꾸겨넣고 다른 나라에 가면, 또 낯설고, 다시 혼자였다. 겨우 적응해서 뿌리를 내리면 귀국을 했고, 돌아오면 고국에서 이방인이 되어있었다. 외국을 오가는 어린 시절이 부럽다는 말을 아무리 들어도,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던 적은 없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프랑스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초등학교 중간까지 다니다가 미국을 갔고, 중학교 중간에 다시 귀국해서 한국에서 잠시 다니다가 프랑스로 가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은 한국에서 졸업했다. 여행 일정이나 이력서라면 참 멋지고 다채롭다고 할 듯하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었다면 유목민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유목민처럼 산다는 것은 여행과 다르다. 일상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신선함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이 바뀐다. 정착지를 옮기는 이민과도 다르다. 다른 장소에서 정착하는 이민과 달리, 유목은 장소와 사람에 대한 애착을 형성한 후 분리되는 경험의 반복이다.
수국은 토양의 산도의 영향을 받아 산성인 토양에서는 푸른색이 되고, 알칼리성인 토양에서는 붉은색이 된다고 한다. 꽃도 이런데, 주기적으로 대륙을 옮기며 보냈던 시간의 영향이 없을 리가 없다.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한 가지 언어로 쭉 나오는 게 힘들다. 머릿속에서는 세 가지 언어가 섞여서 생각나기 때문에 항상 번역기를 켜고 사는 느낌이다. 만화 주제곡, 유행어, 교육제도 등 한 곳에서 쭉 컸다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들을 처음 들어볼 때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해본 경험을 해본 대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공감하는 경험을 안 해봤다는 소외감이다.
하지만 더욱 장기적인 영향은 가치관의 차이에서 나타났다. 말랑말랑한 마음과 생각을 가진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겪은 유목은 흑백사진 사이에 보이는 원색 같이 튀는 가치관을 형성할 때가 있다. 경험의 불일치는 “외국에서 살다와서 모르는구나"라는 말 한마디로 쉽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생각의 차이는 그렇지 않다.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반응보다는 당황한 표정의 침묵이 더 많다. 가치관의 차이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거부감에 직면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주변과 섞이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주변 환경에 맞추고, 고향을 물어보면 출생지만 단답형으로 답했다. 굳이 물어보거나, 어느 정도 친해지기 전까지는 복잡한 주소지 이동 경로에 따른 소회를 말하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 내가 속한 곳에 되도록 섞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난 정착민 코스프레를 했다. 어렸을 때 이삿짐을 쌌던 것처럼, 현재 내가 있는 곳의 행동양식과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포장해서 마음속 한켠 컨테이너에 넣어두었다.
물론 잘 되지는 않았다. 숨기려고 하지만 위화감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정상적이지만 일반적이지 않다. 반듯하지만 전형적이지 않다. 주변 환경에 맞추려고 아무리 노력하는 게 티가 난다. 다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느껴지는 다름의 거리에 비하면, 위화감 정도면 성공적인 코스프레였다.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드러낸다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주거나, 간혹 분노를 자극할 수도 있었다. 유목민처럼 여기저기를 거치며 형성된 가치관은 절대 편집 없이 노출하면 안 된다는 사실은 불편하고 어색한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자연스럽게 학습되었다. 스스로를 숨기는 습관은 제2의 천성처럼, 집에서 나오면 자동 실행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정교한 가면극은 결혼을 하면서 끝났다. 있는 그대로의 내 생각과 내면이 드러날 때마다, “그래서 좋아"라며 웃어주는 사람을 만났다. 더 이상 정착민 코스프레를 할 필요가 없었다. 정착하는 곳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었던 것이다. 언어가 섞여서 나와도 내 말을 들어주었고, 가치관이 달라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약간은 다른 성장과정을 통해 느끼는 괴리감도 있지만, 그로 인해 형성된 장점도 많다며 용기를 주었다. 물론 “한국에서는 그러면 안돼"라며 남편이 무사히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지만, 적어도 집에서는 내가 붉은 수국인지 푸른 수국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아들이 태어나자,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아빠처럼 외국을 오가며 키워도 될까?
아빠가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아들도 아빠처럼 외국을 오가며 글로벌하게 키우면 좋겠다는 대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기업이라면 국내와 해외를 오가는 프로그램을 운용하도록 적극 권고하겠지만, 과연 행복한 어린 시절일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아들까지 같은 경험을 하게 한다는 생각만 해도 죄책감이 든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보다도 세상은 더 좁아졌다.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정착보다는 유목이 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한국에서 계속 키우는 것은 괜찮을까?”
평생 한국에서 커온 사람들도, 아이 때문에 고국을 등지고 떠난다. 정 붙이고 클 기회를 주지 않고 유목민으로서 떠돌게 하는 것도 잔인하지만, 아빠가 되어 보니 계속 살도록 두기에는 한국은 유난히 아이들에게 잔혹한 곳이었다. 돌이켜보니, 타국으로의 이주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귀국이었다. 그 나라의 말을 배우지 못해 소외당했던 기억만큼, 모국어를 공유하는 이들로부터 배척당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이곳은 배타적이고, 경쟁에 매몰되어 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것들보다는 억지로 외워야 하는 것들이 더 많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미래학자가 된다. 이 아이가 커서 마주할 세상이 어떨지 예상하면서, 지금이 아닌 미래의 시점에서 무엇이 최선일지에 대해 고민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역사학자가 된다. 나의 경험이 아이에게 디딤돌이 되기를 바라고, 과거의 나에 얽매어서 미래의 아이를 구속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아이를 위한 미래학은 사유와 상상력 안에서 즐거울 수 있다. 그러나 아이를 위해 나의 과거를 직면하는 과정은 부끄럽고, 슬프고,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돌이로 살아온 내가 한 아이의 구심점이 되려면 한 번은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내가 앞으로 쓰게 될 글들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분들이 있다. 우선 한국에서 자녀를 키우기 싫으신 분들이다. 아이를 위해 이 땅을 떠나는 것을 고려하고 계신다면, 적어도 한 명의 사례를 통해 타국에 갔을 때 아이가 직면하게 될 어려움에 대해 읽고 가셨으면 좋겠다. 한국이 아이를 위해 완벽한 곳은 아니지만, 국경 너머에 아이들의 낙원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글로벌한 인재상으로 자녀를 키우고 싶은 분들께서도 읽어주시길 바란다.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면, 외국어를 배우는 것 보다도 어렵고 지난한 과정을 아이와 부모가 함께 겪어야 할 수 있다.
공간이 변하면 사람도 변한다. 아이는 더 빨리, 더 많이, 더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변한다. 하지만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전 세계의 바다를 돌아다니면서도 마음은 심연으로 한없이 가라앉았던 ‘해저 2만 리'의 네모 선장에 공감한 나의 어린 시절의 아픔이, 아들에게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한편으로는 점점 더 좁아지고 복잡해지는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켜주고 싶다.
답을 찾지 못할 수 있다.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빠의 고민은 멈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