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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의 서재 Feb 21. 2022

2. 완전히 다른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을까

제도가 바뀌면 아이도 바뀐다

어느 나라에 가도 소위 '국제학교'라는 타이틀을 가진 학교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의 시스템에 맞춰져 있다. 다양한 버전들이 있어 세부적으로 논하기 어려우니, 이를 '구미식 시스템'이라고 칭하도록 하겠다. 만약 자녀를 외국에서 공부시키고 싶거나, 어쩔 수 없이 외국으로 이사해야 한다면 한 번쯤 차분하게 자녀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이 시스템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구미권 교육제도는 한국과는 다르다. 한국만큼 표준화되어있지 않고, 좋게 말해 다양하고, 현실적으로 보면 더럽게 복잡하고 어렵다. 부모에게도 어렵고 학생에게도 그렇다.


지식에 접근하는 틀 자체가 다르다. 전 세계의 교육제도를 이해하고 비교하기에는 나의 경험이 제한적이고, 벌써 십 년도 더 지나서 업데이트가 안된 점들도 많을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한 것임을 감안해주시길 바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학생으로서 느낀 두 시스템 간 운영체제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이 있다. 출국을 앞두고 있는 학부모라면 한번쯤 깊게 생각해볼 만하다.




정답이 없다


답이 정해져 있고, 그 답을 맞히는 방식은 중학교 정도에 끝난다. 학교나 선생님에 따라 간혹 단순 암기를 강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단답형이나 사지선다형 시험은 '퀴즈' 정도로 비중이 낮고, 학생에 대한 평가 기준보다는 교실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도구로 쓰인다. 평가의 기준은 맞는 답을 썼는지가 아니라, 스스로 말이 되는 답을 도출했는가이다. 학생이 쓴 답안지가 말이 되는지, 알고 쓴 말인지, 어디서 대충 듣고 외워서 쓴 건지, 교과과정을 온전히 이해했는지를 면밀히 들여다본다. 대신 한 가지 답만 정해놓지는 않는다. 정해놓은 답이 아니더라도, 정확한 근거를 토대로 주장을 펼치면 오히려 높은 점수를 받는다. 물론 수학이나 과학 과목에서 참신한 '주장'을 해서는 안되지만. 이러한 문제들이 시험에 나온다.

영어(English): J.P 사르트르 작품 중 3가지를 자유롭게 택하여 '실존주의(existentialism)'이 주장하는 바를 설명하시오.
문학(literature): 맥베스(Macbeth)는 본질이 악당일까, 악당이 된 것일까? 작품 내 예시를 포함하여 서술하시오.
생물학(biology): '식도에서 직장까지의 소화 과정을 서술하고, 박테리아에 오염된 음식을 섭취한 경우 인간의 신체가 대응하는 방식을 2가지 이상 설명하시오.'
역사(history): '무솔리니는 독재자였는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로 독재 권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는가?'


구미권 시스템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open-end question이 많아진다. 수업시간에 배우는 내용을 재료로 얼마나 습득한 지식을 서술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작문(writing)의 비중이 높다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시험을 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중이 큰 시험일수록, 문제지는 짧고 답안지를 쓰는 종이는 길다. 영국의 A-level이나 국제학교 표준인 국제 바칼로레아(International Baccalaureate)를 회상해보면, 문학(literature) 같은 경우에는 분량 제한도 없이 시험 시간은 3시간인데 질문지는 다 합쳐도 A4 반쪽을 넘지 않는다. 수학 시험은 문항이 6개에서 10개 정도지만, 모든 과정을 다 증명하면서 써야 한다. 수학 공식도 제공해주고, 계산기도 쓸 수 있는데 2시간이 빠듯하다.


구미식 시스템은 학생도, 교사도, 부모도 괴로운 이 시스템을 고집한다. 시험이라기보다는 심문에 가깝다. 네가 이 내용을 이해했는지, 왜 이렇게 답안지를 썼는지, 너의 생각은 어떻게 그 생각이 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지를 심문한다.

정답은 없지만 기준은 있다. 수십 년에 걸쳐 쌓인 경험이 시스템에 내재화되어있어서, 왜 내 점수가 낮은지 이의를 제기하면 잔인할 정도로 상세하고 정확한 피드백을 받을 수도 있다 - '네가 이래서 바보란다.'

역사 시험에서 '무솔리니는 완벽하게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다'라는 답을 서술하였다면, 내 답안지에는 근거가 되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이 포함되어야 한다.

가끔 수학이나 과학에서는 한국 학생들을 위한 배려인지, 객관식 문항을 포함하기도 한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답을 고르는데 달인이 된 한국 및 동북아시아 학생들이 (a), (b), (c), (d) 중 고민하다가 '아하!'하고 정답을 고르면, 아랫줄에 이렇게 쓰여있다 - "Why?".


도대체 왜 이딴 식으로 시험을 보는 것일까라고 투덜거리며 시험장을 나오면, 시험지보다도 더 긴 분량을 요구하는 숙제가 기다리고 있다. 이것도 다 손으로 써서 내야 한다. 요즘에는 컴퓨터로 써서 제출해도 되는데, 교사들이 웹 상에서 카피킬러(copykiller - 표절검사 프로그램)를 돌린다고 한다. 한국의 시스템이 한정된 분량의 지식을 누가 더 잘 습득했는지를 평가한다면, 구미권 시스템은 엄청난 분량의 지식을 누가 더 잘 소화했는지를 평가한다.



독해(reading)를 못하면 공부를 할 수 없다


시험과 숙제가 이렇다면, 평소 수업은 도대체 어떻게 진행될까? 한국 기준으로 중학교 3학년 정도부터는 학생들의 가방이 무거워진다. 교과서에 따라붙는 리딩용 책 때문이다. 역사, 수학, 물리, 화학 등은 지정된 교과서가 있고, 각 과목마다 학생들은 바인더를 구매해서 리딩 자료를 인쇄해서 정리한다. 학기 중간 정도 되면 보통 바인더를 하나 더 산다.


문학 같은 경우에는 교과서가 따로 없다. 대신 이번 학기에 어떤 작품들을 할지 알려주고, 도서관에 가라고 한다. 한 학기에 다루는 분량은 보통 소설 1권, 희곡 1~2편, 시집 1권, 단편소설이나 수필 몇 편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에서 막 왔을 때, 발췌된 지문에 익숙했던 나는 도서관에서 '한 학기 분량'의 책들을 수령하며 절망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시험장에 책을 가져갈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픈북(open book) 시험이면 뭐하나. 저렇게 읽을 분량이 많은데. 어떤 문제가 나올지는 예측이 불가능한데 소화하는 분량 자체가 너무 많으니, 공부하는 방식 자체가 문제풀이나 암기가 될 수 없다. 독해 기반으로 내용을 진짜로 소화해야 한다.



자기주장(argument)이 없으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구미권 시스템에서 동양권 학생들을 끝까지 괴롭히는 시험지의 문구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in your own words"일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내 생각을 쓰라니. 답이 아니라 내 생각이라니. 의견을 쓰란 말인가? 그게 틀리면? 말이 안 되는 내용이어도 우기라는 말인가? 말이 되는 게 있다는 건가? 그게 답 아닌가? 도대체 무슨 말이지?


의역해보자면 이 말은 '네가 배운 것에 근거하여, 네 시각을 서술하여라'라는 뜻과 가장 가까울 듯하다. 어디서 본거 베끼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핵심은 '너의 시각에 기초해서 네가 배운 방대한 분량을 줄여보아라'일지도 모르겠다. 구미권 시스템의 출제자들도 교과목 과정 분량이 방대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걸 다 알고 있는지 평가할 수 없고, 시험 분량과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니 그 제한사항에 학생이 맞춰보라는 말이다.


출제자의 권력에 눌려 맞는 답 아니면 오답이라는 틀에 훈련된 동양권 학생들은 자기주장 없이 배운 내용만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한 학기에 배웠던 내용을 다 쓰려니, 당연히 분량은 초과하고 시간은 부족하여 울면서 시험장에서 나온다. 물론 한 학기 정도면 제도에 적응해서, 나중에는 그 제도 안에서도 앞서 나가지만.



토론에 참여하고 질문을 해야 한다


이런 난해한 관문들에 적응해도, 다른 점이 또 있다. 평소 수업에 적극적이고, 다른 학우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도 평가한다. 잠깐, 독해 기반으로 배운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학생이 집에서 읽어오는 거다. 보통 수업 전에 리딩을 해오라는 과제가 주어진다. 수업은 선생님의 설명 40% 이하, 나머지는 전부 토론이다. 학생들끼리 논쟁을 벌이도록 적극 권장하며, 참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을 봐도 성적표는 A- 가 뜰 수 있다. "수업 내용은 충분히 숙지하고 성실하게 임하나, 수업 참여도가 저조함"이라는 노트와 함께.


토론에 소극적이거나, 의견 개진을 안 하면, 분명히 점수 상 불이익이 온다. 숙제도 완벽하게 해 가고, 시험도 잘 보지 않았느냐라고 따지면, '그건 일회성이고, 전체적인 과정을 이해하고 따라오는지 평가하려면 토론 때 너의 모습을 봐야 한다'라는 답을 듣는다. 사람마다 성향이 있는데, 어떤 학생들은 의견 개진에 능숙하고, 선호할 수 있지만,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것을 부당하다고 반문하면, '그래서 토론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에게는 선생님이 질문하지 않느냐'라는 냉정한 답을 듣는다.


구미식 시스템에서는 손을 들고 "내 생각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것이 흉이 아니다. 물론 헛소리 하면 선생님에게 혼나는 게 아니라, 친구들에게 단체로 두들겨 맞는다. 미국인 친구 하나는 "미국은 다른 나라를 침공한 역사가 없다"라는 주장을 펼쳤다가 중남미, 중동, 아시아 친구들에게 그 수업 내내 반론을 들어야 했다. 선생님이 사회를 보면서.




나는 구미식 시스템이 더 좋은 교육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를 뿐이다. 제도는 문화와 철학을 반영한다. 한국의 교실과 비교하면 더 적극적이고, 개방적이며, 미래지향적이라고 보일 수 있지ㅠ만, 완벽한 제도도 아니고, 단점이나 허점도 많다. 학생들이 받는 스트레스 역시 한국보다 절대 적지 않다. 교사도, 학생도, 학부모도 교육제도에 대해 불만이 많은 모습은 다른 문화권에 가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키우다가 외국으로 가야 한다면, 선택에 의해서 건 상황에 의해서 건 구미식 시스템을 접해야 한다. 나는 저 시스템을 접하고, 나름 적응하려고 했었고, 귀국하고 나서는 한국의 시스템에 다시 적응해야 하는 경험을 했었고, 유사한 경험을 함께 한 친구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학생은 한국식 시스템에서, 어떤 아이는 구미식 시스템에서 날개를 단다. 어떤 아이에게는 외국 학교로의 전학이 축복이 될 수 있지만, 다른 아이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선택할 수 있다면, 부모의 의사보다는 아이의 성향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추천한다. 선택권이 없이 온 가족이 외국으로 이동해야 한다면, 아이의 성향을 차분히 바라보길 바란다.


유목을 한다는 것은 한 컴퓨터에 MAC OS를 설치했다가, Windows를 설치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과 유사하다. 외국으로 가면 아이의 외국어가 얼마나 늘지 기대하는 경우는 많지만, 익숙해진 제도를 버리고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는 과정은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언어보다도 더 큰 변화인데도 말이다.



마지막 팁: 다른 시스템을 접했을 때 내 아이가 어떻게 반응할지 잘 모르겠다면, 본인이나 배우자를 대입해보자.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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