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001, <별것 아닌 선의>
충남 천안이 본가인 나는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이사는커녕 단 한 번도 고향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었다. 볼일이 있어 다른 지역, 특히 서울을 다녀온 날이면 눈에 익다 못해 지겹기 그지없는 이 동네를 벗어나 꼭 ‘진짜’ 도시에 살리라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진짜’ 도시의 삶이란 녹록지 않은 것이었다. 지난 11월은 정말 그랬다.
휴학 후 구한 무 주휴수당 아르바이트로는 서울에서의 월세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었고, 매일 구직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다음 달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하는 고민으로 밭은 숨을 뱉는 밤을 견뎌야 했다
와중에 갑자기 일을 그만둔 것은 지금 돌이켜보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곧 좋은 일자리가 들어왔고, 지인이 주관하는 행사의 단기 스탭까지 맡게 되어 돈 걱정은 덜었지만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펴지는 데엔 시간이 걸렸다.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불안이 남긴 외상은 매번 나를 어리바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럴 때면 주변의 사람과 상황과 또 그것들이 존재하는 시간은 나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수와 실례로 얼룩진 하루를 보내고 혼자가 됐을 때 느끼는 괴로움은 오래간다. 그 시간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해 집어 든 책이 ‘별것 아닌 선의’다.
선의, 단어 그대로 ‘한 사람의 의롭고 좋은 마음’의 힘이 작용하는 범위는 크지 않다. 대개 선의는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것이다. '별것 아닌 선의'로 엮인 50편의 글 중 ‘찰나의 선의’는 과거 작가가 위와 같은 이유로 ‘선의’에 대해 냉소했던 이야기가 솔직하게 담겨있다. 과몰입 사회학도로서(학부생 나부랭이) 나 또한 ‘빈곤과 부조리’ 등의 사회 문제는 ‘체제와 자본의 모순’ 즉, 구조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호의나 미담으로 덮이고 흐려져서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과 사람이 복잡하게 얽혀 주고 받는 영향력이 오늘 날의 사회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미시 이론보다, 인간의 힘을 압도하는 거대한 체계와 구조가 있고 그 안에서의 우리는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하다는 거시적 설명에 은근히 매료되어 있었다. 거시 이론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명쾌함이다. 나와 타인이 왜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지는 모두 그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나와 타인의 악함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정당화하는 편리한 도구로 쓰였다.
‘내가(혹은 남이) 어쩔 도리가 있나.’
저자 이소영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며 선의에 대한 냉소와 '문제의 원인을 치열하게 파고들어 투쟁'하는 것은 엄연히 다름을 꼬집는다. 그렇다. 선의를 얕잡아 보는 것이 곧 그 사람이 거시적인 안목의 소유자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또 선의가 한 세계를 구원할 힘은 가지고 있지 않을지언정, 한 사람의 세계는 구하고도 남는다.
가난했던 나는 그 미소한 배려들이 얼마나 세심히 마련되었을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채 주는 대로 받아 가졌다. 받아가진 자로서 무얼 하면 될지, 은혜 갚은 까치의 시점에서 골똘히 생각해본다. 생의 여정 중 맞닥뜨릴 고단한 이들에게 몸을 누일 열차 칸을 그때그때 내어놓는 것, 그리고 주는 대로 받아 갖는 누군가를 만나거든 나 또한 ‘그럼에도 재차 뭘 내미는’것. - 26P
‘은혜 갚은 까치의 시점에서’는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던 작가의 대학시절 일화가 담겨있다. 현재의 밥벌이와 미래의 밥벌이 모두를 끙끙 혼자 짊어져야 하는 고된 스물의 삶 속에서 누군가의 배려와 선의는 고마운 것을 넘어서 절실하다. 특히 이 불안한 나이를 남들보다 부족한 보호장비를 갖추고 헤쳐가야 하는, 그래서 ‘세심증’을 앓을 수밖에 없는 이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세심증’ 환자로 산 지도 이제 한 두 해가 아니다. 경험에 따르면, 이 지독한 만성 질환은 어떤 강렬한 욕구와 함께 찾아든다. 하던 일을 관두고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찾는 시기에 찾아오는 세심증은 생활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싶은 ‘안전욕’과 동반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우왕좌왕 내 자리를 찾지 못할 때의 세심증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인정욕’과 찾아온다. 잘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여유 없는 사람에게는 덫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느껴지면서도 작가의 서툴었던 시절을 엿보며 '나만 이런 건 아니구나' 안도할 수 있었다.
바라던 바와 점점 어긋난 모습으로 비칠 것이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웠다. 만회하고 싶었고, 상황을 내 힘으로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내면의 소용돌이가 점차 커져, 종국엔 지인들도 어렴풋이 감지할 정도가 되었다. 복도 저편에 그분이 걸어오시는 걸 보고 꽈당 넘어지기도 했다(웃기려고 지어낸 일화가 아니다). -144p
생의 처음에서 모두는 서툴고 불완전하다. 그래서 삶을 무결한 선과 절대적 정의 하에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난해 참가한 학회 세미나에서 한 학우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정의(justice)를 어떻게 정의(definition)하겠냐는 물음에 그는 '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이상에 가까워지는 것이 정의다.'라고 답했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공동체 속의 작은 '선의'는 바로 이러한 실천적 정의에 대한 것이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올 게 아니면 관둬라'가 아니라 짬짬이 가능할 때마다 스스로의 삶을 복기하고. 누군가의 고통에 선의로 응답할 수 있도록 깨어있으라는 것.
착한 척한다고 비난하면 달게 받겠다. 나는 냉소보다는 차라리 위선을 택하려 한다.- 10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