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이랑 연말 단독 공연 <의식적으로>
지하 소극장 특유의 복작거리는 분위기와 묵은 먼지 냄새. 작은 공연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응당 설레게 할 요소들이다. 그런 풍경 안에서는 사람들에게 치이는 것도 정겹게 느껴진다. ‘연말 콘서트’라는 이름 때문에 멀게만 느껴졌던 공연 날이 12월과 함께 성큼 다가왔다.
자리는 (무려!) 첫 번째 열 왼편 구석이었다. 누구는 1열 사이드를 가느니, 차라리 두, 세줄 뒤 "중블"에서 공연을 보겠다고도 하지만, 구석은 구석만의 매력이 있다. 중앙에서 보는 무대는 평면으로 보인다. 따라서 관객의 시선은 불가피하게 객석을 기준으로 가장 크게 보이는, 즉 가운데에서 가장 관객석 쪽으로 나와 있는 사람(혹은 풍경)에 집중되지만 측면에서는 입체를 볼 수 있다. 때문에 무대를 기획한 이의 의도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시선을 움직여, 중앙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무대의 미소한 움직임을 더러 느끼기도 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입체를 조망할 수 있는 것 말고도 좌측 측면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특권이 있었다. 숨 닿는 거리에서 첼리스트의 연주를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가까웠냐 하면, 그가 찬 팔찌가 찰랑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앰프를 통하지 않은 현악기의 울림을 코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건 정말 귀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긴장감 있는 현악기의 음색과 팔찌가 내는 금속성의 소리가 만드는 하모니는 그 공간에서 나만 느꼈을지도 모를, 신비롭고 아름다운 합주였다.
이랑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정규 3집 <늑대가 나타났다>의 '늑대가 나타났다'를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살면서 나름대로 다양한 음악을 들어왔다고 자부했는데, 이랑의 음악은 (포크라고는 하나) 그 장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정말 포크 같기도 하고, 뮤지컬 넘버 같기도 하고, 격정적인 데모 음악 같기도 하고. 그렇게 낯섦에도 불구하고 이랑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모든 창작물에 어떤 방식으로든 스며있는 반항적인 정서 때문일 것이다.
음원에서는 은유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다면, 공연은 더욱더 제대로 반항적이고 정치적이었다. 자궁경부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형형한 눈빛으로 무대에 오른 이랑은 객석을 마주하고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 같으면서도, 모두의 의식 끝에 저물어 있던 보편적인 생각들을 꺼내 놓았다.
거울을 볼 땐 얼굴을 보지 않고
(그래 그렇게 질문부터가 시작인걸)
발가락이 움직이는 것만 보곤 하지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했고)
난 그렇게 살아왔어
(너는 왜 듣고 있는지)
- 이랑 <대화> 중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고 했던가. 이랑의 노래는 이 슬로건과 잘 어울린다. 침침한 조명과 잠긴 듯 낮게 읊조리는 말로 시작하는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는 표면적으로는 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화자의 개인적 번뇌와 한탄처럼 들리지만, 그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상상해보면 다른 의미들이 펼쳐진다.
'잠 못 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우리는 죽고 싶은 걸까 아니면 살고 싶은 걸까'
'내 친구들은 모두 잠이 들었을까'
가사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곡은 '불면증'을 개인의 질병인 동시에 다수가 경험하는 사회적 현상으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곡 속에서 반복 등장하고 제목의 일부이기도 한 부사 - 는 '불면'이 되려 그것을 경험하는 한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회적 병리 현상임을 역설逆說 하는 도구로 쓰인다. 집을 나서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 땐 거창한 일들을 벌이고 커다란 이야기를 쏟아내지만 결국 혼자가 된 밤, 잠자는 것 하나 내 뜻대로 하지 못하고 무력해질 때의 감각을 날것 그대로 담은 듯하다.
우리는 죽고 싶은 걸까 아니면 살고 싶은 걸까
아이고 모르겠다
그냥 잠만 좀 편하게 들면 좋겠다.
- 이랑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 중
(순전히 개인적인 감상으로) <대화>와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가 순한 맛이라면, (이랑의 말을 빌려)다 멸망해 버리자는 파괴적인 내용의 매운 맛 곡들도 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그 곡들을 '맛있게 맵게' 만든 감초이자 주역들이 있었다. 합창단 '아는언니들'은 다들 각자의 생업이 있음에도 3일 동안 진행된 콘서트에서 든든히 자리를 지켰다. 대망의 <늑대가 나타났다>의 연주 전, 이랑과 '아는언니들'은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제정하라. 투쟁!"을 온몸으로 외치며 긍정적인 데모 분위기(?)를 돋우었다.
또 투병 중인 이랑을 위한 '긴급 브레이크 타임'에 MC로 투입된 '권사딸 금개'와 '무당딸 셀럽맷'은 형식에는 충실하지만 내용은 불경스럽기 그지없는 기도문을 '찬송' <욘욘슨>과 함께 준비했다. 장내의 분위기는 단연 뜨거웠다. 일명 '이랑을 위한 기도'는 통성 기도문과 무속 스타일 두 버전으로 이랑과 그의 반려묘 준이치를 축복해 주시길 바랐고, '너무나 어둡고 외로운 시대'에 (하늘에 계신 분들이 염치가 있으시면) 희망을 가져다주시길 간청했다. 특히 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희망을.
애초의 기대와 공연이 사뭇 달랐던 건 사실이다. 퍼석퍼석한 일상을 잠시 놓고 단돈 6만 원으로 음악에 집중해 온전히 쉴 수 있는 두 시간을 사겠다는 게 본래의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일명 '온택트' 문화 예술을 탐탁지 않아하는 것도 예술을 향유하는데 '현장감'이라고 불리는, 외부와의 총체적 단절감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한편, 이랑의 공연은 차별과 혐오, 가난, 성적 지향, 페미니즘 그리고 차별금지법 등 외부의 문제들을 끊임없이 무대에 올렸다. 초반에는 좀 피곤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기분 좋게 즐기지 못하고, 중요하지만 머리 아픈 일들을 다시 생각해야 하나?'
그런 불편한 감정은 이랑의 작업에 대한 어슬픈 이해의 반증이었다. 앵콜곡이였던 <환란의 세대>는 제목과 같이 불의한 세상에 태어난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하려면 '한꺼번에 싹 다 가버리는 멸망'을 통해 '동시에 다 죽어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자살을 조장하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환란의 세대>를 통해 이랑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과 파멸 그 자체가 아니다. 외려 삶과 사람에 대한 열렬한 사랑 고백에 가깝다.
이랑의 음악에 반항적인 정서가 서려있어 좋다고 말했다. 그 반항은 합당한 반항이다. 내가 사는 세계를 사랑하고 싶지만 도저히 사랑하기 어려울 때, 세계에서 나의 사람들이 끝없이 고통받고 있을 때. 그때에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파멸'을 주장해야 하고, 또 '정치'도 해야 한다. 늑대, 폭도, 그리고 이단이라는 오명을 쓰더라도 '내 자식을 굶겨 죽이지' 않고 '쓸모없는' 사람 취급받지 않으려면, 우리의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거듭 요구해야 한다(<늑대가 나타났다> 가사 인용). 이랑은 그렇게 예술이란 형식을 빌려 파멸을 말하며 희망을 구하고 있었고, 불편한 기색으로 쭈뼛대던 사람들도(바로 나다) 어느새 그의 리듬에 맞춰 흥겹게 춤을 췄다.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너희가 먹는 빵을 만드는 사람일 뿐.
포도주를 담그고 그 찌꺼기를 먹을 뿐
내 자식을 굶겨 죽일 수는 없소
- 이랑 <늑대가 나타났다> 중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듣는다. 왜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만든 낯선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찾는 걸까? 누구는 다양한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견문을 넓히고 싶어서, 즉 자아의 외부를 확장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한다. 그것도 맞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스스로를 이해하고 싶어서, 아직도 미궁으로 남아있는 나를 제대로 알고 싶어서 이야기를 찾을 때가 더 많다. 더 이상 나를 소외하지 않고, 나의 삶에서 자아가 차지하는 부피를 키우기 위해서 말이다.
'유퀴즈'의 '스트리트우먼파이터' 특집에서 댄서 모니카가 한 말에 공감했다. '나는 항상 소외감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그 응어리진 마음의 종류와 깊이는 내 것과 비교할 수 없을지언정 '소외받고 있다'는 감각은 항상 곁에 자리하고 있다. 공연이 끝나고 어김없이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보고 싶던 공연을 드디어 봤다는 들뜬 마음 때문인지는 몰라도-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고 헤어졌을 때처럼 소외감과 외로움을 한 줌은 덜어낸 것 같았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 <신의 놀이>와 같다는 게 무슨 뜻인지 비로소 이해가 됐다.
어쩌면 난 영화를 만드는 일로
신의 놀이를 하려고 하는지도 몰라
...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 이랑 <신의 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