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등단기
그에게 이번에 응모한 단편들이 안 된 것 같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내게 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부쩍 요즘 들어선 지난날 학교에 재직할 때와 현재의 일상을 비교하며 지금 누리는 여유와 행복에 감사한 적이 많았다. 그와 동시에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을 느껴서 내가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고, 그 증거로서 작가로 등단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그런 나의 목표에 적지 않은 압력을 스스로 불어넣어 무턱대고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교사직을 그만둔 것에 대해 가족들에게 빚진 마음 탓인지도 모른다. 직장에서 2년을 더 버티었더라면 지금의 조급한 마음이 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확인할 수 없는 추측일 뿐이다.
첫째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고 공부를 시작해서 시험을 치르는 일은 적지 않게 떠들썩하고 가족들 모두의 희생과 배려를 요한 것이었다. 직장에 다니는 동안 나는 일과 육아의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로 내 기억상으로는 일만 하다가, 명예퇴직을 2년 앞둔 어느 날 학교를 그만두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자아 성찰이랄지 생각이 많아진 탓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나름대로는 작가가 되려는 운명의 이끌림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남편의 너그러운 배려심을 구석구석 털어내고 부모님과 아이들의 이해를 구해야 마땅할 터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뻔뻔하고 단호하게 그만두겠다고, 예고도 없이 선언하듯 말했다. 아이들은 ‘이제 와서 왜?’라는 의문을 제기했고 부모님은 놀라고 황당한 심정에 더해 옅은 배신감으로 상처받으셨다. 18년을 해왔는데 단 2년을 더 버티지 못하는지, 나로서도 참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마음을 먹고 나니까, 평소에 그다지 매듭 있는 편도 아니면서 그 당시에는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게 어기차지고 말았다. 그때 가족들에게 차마 글을 쓰겠다고는 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 2년만큼은 만회해야 한다는 의지를 속으로 품었다.
하지만 품은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은 참으로 덧없이 흘렀다. 먹고 자고 읽는 것 외에 아무 일도 없이 2년이 아무것도 아니게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뭐라도 써야 한다는 생각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여러 장르의 쓰기에 대한 고민 끝에, 막연하게 마음이 끌리는 이유로 소설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즈음이 돼서야 나는 가족들에게 조심스럽게 글을 써볼 생각이라는 말을 꺼냈다.
부모는 자식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지고 만다. 나의 부모님은 이미 오래전에 내가 일으키는 모든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항복을 선언해 왔지만 그럼에도 나는 또다시 공격을 가하고 마는데, 이번에는 소설가라는 피켓을 들고 돌진했다. 특히 어머니는 가짜 이야기를 무척 싫어하셔서 드라마도 시청하지 않는다. “그 가짜 이야기를 무엇하러 보는지는 통 모를 일이다.”라는 게 어머니의 상식인데 나는 무려 그 가짜 이야기를 쓰겠다고 했다. “이재명이 한테 소설 쓰지 마라 카더라만은, 그 소설하고 같은 기가, 니가 한다는 기.”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돌하르방의 얼굴처럼 꺼멓게 굳은 것 같았다. 자꾸만 눈 밑이 쳐진다고 걱정하시더니 고스란히 축 처진 모습이었다.
가족 중에 누구도 내가 작가가 되나, 어쩌나 하면서 뱁새눈으로 지켜보는 이가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느긋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 3년이 되어가는 지금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내가 하려는 일이 가치 있고 보람된 –그래서 돈도 제법 되는- 일임을, 내가 주저앉고 만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고 했다.
이런 외적 동기뿐만 아니라 내적 필연성을 느끼기도 했다. 책상 앞에서 꼼지락거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내게 아주 오랜 습관이 되었고 음식 만드는 일은 젬병이고 다른 취미가 있지도 않은 데다가 은둔형이라서 나의 하루는 말하자면 작가가 되기 위한 시간이 대부분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 당연한 어떤 결과물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상식선의 생각과 기대에 닿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쓴 글들은 여기저기 허점투성이고 주관이나 개념 없이 생각만 있는 글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덜 된 글로 응모하고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요행을 바랄 때 더욱 간절해지는 법인지 나는 안될 걸 알면서도 애걸복걸하듯 기다리는 심정이 되었다. 물론 나는 안될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껏 살면서 몇 번의 이런저런 시도를 해 오면서 깨닫게 된 사실은 나의 시도가 성공할지 아닐지는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나 자신이 이미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헛된 시도일 경우에 즉, 실패를 앞두었을 때 마음이 더욱 절실하고 간절해진다는 것이다. 마치 떠나려는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그런 질척하고 절절한 마음과도 같다. 그리고 그 막연하고 기나긴 기다림이란.
희망에 찬 기다림과 상실감을 동반한 기다림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실망과 상실감은 매일 밤 꿈결에서부터 시작되어 다음 날 잠들기 전 잊기 위한 노력으로 끝난다. 미련한 기다림에 대한 책망인지 반복되는 꿈은 긴박하고 어수선하게 흐르고 그 와중에 틈틈이 깨어나는 나의 감정은 안타까운 좌절이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 몽롱한 정신을 커피로 깨우며 신문을 펼쳐 보지만 참혹한 전쟁 보도에 과몰입하다가도 눈을 떼고 나면 기다림에 대한 자각이 슬금슬금 다가와 우울감으로 녹아들고 어느샌가 깊은 슬픔이 아닐지 의심이 들 정도로 심연을 도려낸다.
내가 느끼는 실망감이 턱 없이 과하다고 여기면서도 말끔하게 털어내지 못하는 와중에 기억이, 비슷한 상황에 똑같은 심정이었을 기억들이 밀려온다. 그 몇 번의 실패와 거절당한 경험들은 그것을 겪은 이후부터 언제나 내 주변을 서성이며 나를 환기해 왔으므로 ‘떠올랐다’기 보다는 ‘잊은 적이 없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나는 그 경험마다 깊은 상실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보냈고 지금 나의 의식은 그것을 재탕하려는 단순하고 음침한 욕구의 발로일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매일 걷는 산책길을 따라 떨어지는 낙엽을 잡을 수 있다면 어떤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미신도 샤머니즘도 아닌 엉뚱한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가지에 달려있던 잎이 우연한 바람결에 요행히 내 손안에 안착하지 않는 한은 떨어지는 순간에 손을 뻗어 잡는 게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슬그머니 그 작업에 집착하게 되었다. 오늘 아침에도 무수하게 떨어지는 잎사귀 중에 단 한 닢조차 내게 오지 않았고 그건 같은 맥락의 실망감을 안겼다. 어쩌다가 울리는 전화와 메시지 알람에 솔깃해지지만 내 카드를 긁어 봄이 어떠할지를 묻는 것들인데, 내 전화번호를 접수한 광고들이 그다지도 많았음에 새삼 염증이 일었다.
나는 이성을 찰싹 때려 한심한 상실감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울감으로 물러나지 말라고 엉덩이를 차 주어야겠다고 여기며 그러기엔 내게 온 가을이 무척이나 짧을 것이라는 여러 상념을 곱씹다가 불쑥, 남편에게 지난번에 응모한 게 여태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안 되었다고 자백하듯 말했다. 그러자 남편이 잠깐 뜬금없는 소리를 들은 표정이다가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온 힘을 바치고 치열하게 사는 동안 잃은 것도 컸잖아.”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머리와 가슴을 메웠던 무언가가 쓸려나가는 걸 느꼈다. 그랬다. 쉬엄쉬엄해서 되는 게 어디 있겠냐며 한 가지 목표만 골몰하던 날들이 있었다. 유년을 지나서부터는 줄곧 그래온 것 같기도 하다. 요 며칠 사이에 나는 우울한 감정을 재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러온 감정을 채찍 삼아 그 미련한 행동을 답습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변하기 어렵다더니만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뭐든지 안달복달하며 치열하게 집중하는 게 과연 내 기능의 디폴트값인지는 몰라도 나의 기다림은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분기탱천하던 때처럼 전략적으로 맹렬하게 덤빌 생각은 다행히 없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절벽을 만나면 뚝. 그게 뭐 어때’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생각과 가치관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작가가 된다는 사실보다는 지금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볼 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목표를 향해 가기를 멈추지는 않을 것이라서, 비록 기다림을 동반하더라도 제발 좀 느긋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