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도하 Feb 27. 2023

인지 부조화

   회귀본능처럼 작동하는 감각이 내게 지금 여기가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올 때가 있다. 이것은 내 껍데기가 너무 멀리 가버렸다는 경고음이다. 나와 분리된 껍데기가 내 방을 빠져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웅크린 채 영상을 보듯이 그것의 행보를 눈으로만 쫓을 뿐이다. 껍데기가 벗겨져 나가고 남은 몸뚱이로 있는 나는 평소처럼 생각이나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벌레가 되어 내 방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생명만 부지할 뿐이다. 껍데기와 나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것이 내게 돌아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자칫 돌아오는 길을 잃고 나면 그것은 마치 내가 된 것처럼 사람을 연기한다. 지시를 내리고 곤란한 척 인상을 쓰고, 뜻 모를 단어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낸다. 그 빌어먹을 껍데기가 점점 더 사람연기에 몰입해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정말 이대로 엎드려서 살찐 벌레가 되어 힘 좋은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고 말 테다. 먼지 구덩이에 뒤엉켜 버석 말라가거나 쓰레기통에 처박혀 버릴 테다 더 늦기 전에 그것의 사람행세를 막아야만 한다. 그것은 감정도 마음도 양심도 철학도 없이 온갖 기술과 계략과 술수로 가득 찬 허깨비일 뿐이다. 나는 기력을 찾고 정신을 차려 그것을 내 방으로 데려와 내 몸에 둘러 거기가 네 자리라고 일깨워줘야 한다. 



   가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랄 때가 있다. 실은 실망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거울 속에 있는 나는 행동이 투박하고 표정이 냉담하고 차가운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런 반면 스스로 인식해 온 이전까지의 나는 여유로운 행동거지와 온화한 표정과 정다운 느낌이었다.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무슨 일 때문에 저런 모습이 된 걸까. 과연 저 모습이 평소에 비치는 나인 걸까. 안타깝게도 그러하리라. 물론 이전에 몇 번인가 내가 나 같지 않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만 주어진 상황에 맞추고 분위기에 편승해야 하는 일종의 적응과 동화 작용이라고 여겼다. 때로는 어려움을 확대해 엄살을 부리고 사소한 편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인상을 굳히고 급하게 항변하려고 사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말들을 뱉어낸 적이 없지 않다. 즐겁지 않은데 웃을 때, 박수 치고 싶지 않은데 환호할 때, 괜찮지 않은데 의연한 척, 빠듯한 계산을 숨기고 여유로운 척, 지칠 대로 지쳤는데 활기찬 척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내 눈과 표정에 의해 진실이 폭로되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런 순간에 거울, 나 자신과 대면한 것이리라. 이럴 때는 내 몸이 현실에 있지 않고 길 없는 미궁 속을 떠다니는 느낌이다. 어딘가로 발뺌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어디선가 흘리거나 놓쳐버린 주머니를 찾듯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더듬어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입만 열면 거짓말인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데, 과연 어느 누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나는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되돌아가야 하는 당위성을 느낀다. 허깨비가 나를 대신해서 사람행세를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껍데기의 사람행세에 탄력이 붙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되고 금세 우쭐하고 안하무인이 되고 마는데, 그런 꼴을 지켜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탐내는 것으로 부족해서 그것 자체로 떠도는 질병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나를 분리시켜 온전히 나 자신을 내보여도 되는 곳으로 간다. 우울하거나 지쳤거나 나약해진 나를 그대로 풀어둘 수 있는 곳으로. 얼마간의 시간이, 그것도 무용한 시간이 필요하며 나의 경우에는 혼자만의 시공간이 필요하다. 증상이 심하지 않으면 하루 정도의 산책, 산속을 걷거나 끝없는 바다를 보는 것으로 족하다. 증상이 축적되어 경고등이 켜질 때는 며칠 동안 혹은 꽤 오랫동안 껍데기를 잘 붙들어둘 힘을 보충해야 하며, 껍데기를 어루만져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것과 화해해야 한다. 그것이 결코 완전한 내가 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서로 사이가 좋아야 하고 서로 소통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이 자신의 사고를 거쳤는지, 표면적인 반응이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부합하는지, 얼굴의 표정이 자신의 감정과 그 결이 같은지 살펴볼 일이다. 내가 인지 부조화의 압력을 견디고만 있지 않은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작가의 이전글 『속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