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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희 Nov 04. 2022

낙엽을 밟으며

  

 그녀의 말은 어렵지 않았다. 심오한 주제를 다루거나 난해한 어휘를 구사하는 일은 없었다. 근자에 이슈가 되고 있는 기삿거리라도 논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버스를 놓쳐 택시를 탔다는 둥 어제 산 구두가 마음에 든다는 둥, 그런 곡해하려야 할 수 없는 평범한 일상을 말할 뿐이었다.

 

 그녀는 말끝마다 심각한 얼굴로 “이해하지?” 혹은 “무슨 말인지 알지?”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녀의 말에 들어있는 속뜻을 내가 건성으로 들어서 알아채지 못한 것인가. 아무리 곱씹어 봐도 비유나 은유적 표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꾸 내가 알아듣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내 말 어렵지 않지?” 하고 물어볼 때면 나는 도대체 어느 대목을 어려워해야 하는지 되묻고 싶었다. 그리 못 미더우면서 왜 자꾸 나를 찾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하얀색을 좋아했다. 즐겨입는 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까지도 죄다 흰색이었다. 피부색까지 희고 맑아서 흰옷을 입은 그녀는 오히려 파리하고 병약해 보였다. 농담 삼아 어디 아프냐고 묻자 그녀는 "나야 늘 마음이 아프지." 했다. 그녀의 아픈 마음을 흰색이 보듬어주나 보다, 그렇게 혼자 짐작했다. 

 

 어느 늦은 가을, 그날도 하얀색 옷을 입고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낙엽이 켜켜이 쌓인 길을 우리는 무작정 함께 걸었다. 스산한 바람이 금방이라도 눈을 몰고 올 것 같았다. 갑자기 그녀가 멈춰서더니 한 그루의 나무를 가리켰다. 힘을 다한 듯 지쳐 보이는 단풍잎 하나가 아직 가지에 달려 있었다. 그 나뭇잎을 바라보며 그녀는 한참을 서 있었다.

 

 “미처 가지 못했구나.” 내가 말했다.

 “보내줄까?” 그녀가 물었다. 

 머잖아 떨어질 잎인데 굳이...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나무에 손을 뻗었다. 단풍잎을 따서 낙엽 위에 놓고 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단풍잎이 고맙다네. 친구랑 같이 가게 해 줘서.” 길어지는 침묵이 싫어서 내가 말했다. 

 그녀가 흠칫 놀라며 나를 보았다. 

 “나뭇잎 생각이 보여?”

 그럴 리가. 그저 던져본 말에 과하게 반응하는 그녀 때문에 내가 더 놀랐다.

 “그게 어떻게 보여? 그냥 해 본 말이야.”

 “가슴으로 들으면 보이는데….”

 “….”

 

 그때 알았다. 내가 그녀의 말을 귀로만 들었다는 것을,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나를 못 미더워했다는 것을….


 그녀가 상담 치료를 받는다는 말을 나는 나중에야 들었다. 그녀는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 병원에 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는 그녀의 말을 귀로 들었을까 가슴으로 들었을까. 


 그녀의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해 줄 사람을 찾았을까? 

 

 가을의 끝자락, 올해도 낙엽이 켜켜이 쌓였다. 홀로 낙엽을 밟는다. 바스락. 낙엽이 전하는 말을 가슴으로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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