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고도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부모님의 이부자리가 정돈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간밤에 별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방문을 열었다. 갓 세수를 마친 듯 싱그러운 아침 공기가 나를 맞았다. 지난밤 쏟아진 빗줄기에 열기도 가신 것 같았다. 지독히도 나쁜 꿈에서 완전하게 빠져나오지 못한 나는 평화로운 아침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른 아침 여느 때처럼 아버지는 지게를 메고 대문을 나섰다. 아버지의 구릿빛 팔뚝에 생명력 넘치는 힘줄이 불거져 나온 것을 보고 나서야 나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책가방을 멨다. 간밤의 꿈은 그저 악몽일 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름을 향해 달려가던 녹음은 수심 가득한 어린 발걸음 앞에 초록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은 온통 지난밤 꿈속에 있었다.
“야, 니네 아빠 권투선수지?”
아버지의 이름이 당시의 유명한 복싱선수와 같다는 것을 재미 삼아 놀리던 남자아이였다. 나는 그것이 왜 그렇게 싫었는지 그 남자아이를 보면 죄지은 것도 없건만 피해 다녔다. 그날은 꿈 생각에 그 아이가 내 옆에 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니네 아빠도 주먹 세냐?”
나는 아버지의 주먹맛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주먹이 그 아이 정도는 거뜬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 정도야 때려눕힐 만큼 세지.’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는 말싸움이 싫어서 늘 참았다.
지난밤 꿈속에서 아버지는 자신보다 두 배는 덩치가 큰 호랑이와 싸우셨다. 마을 사람 누구도 감히 호랑이 앞에 나서지 못했다. 그런데 굳이 아버지가 왜 그 호랑이와 맞서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그 앞에 서 있기만 했다. 그저 구경꾼처럼 보고만 있었다. 아버지와 호랑이의 긴 싸움, 그리고…. 나는 그 무서웠던 장면을 입 밖에 내기라도 하면 아버지가 정말 어떻게 될까 봐 두려웠다.
“우리 아빠는 호랑이도 때려눕힌다. 너도 맞아볼래?”
마치 그 아이가 꿈속의 호랑이라도 되는 양 나는 악을 썼다. 예상 밖의 반응이었는지 그 아이는 흠칫 놀랐다. 그러더니 이내 호랑이가 어디 있느냐며 동물원에라도 가서 싸운 거냐고 웃어대는 것이었다.
“…!”
그렇지! 호랑이가 어디 있어? 우리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날 리 없지! 나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만 잊으면 호랑이가 아버지와 싸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수십 번 계절이 변하고 해가 바뀌었다. 언제부터인지 아버지의 허리가 굽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팔뚝에 생명력 넘치던 힘줄도 자취를 감췄다. 나이의 중력은 아버지를 자꾸만 아래로 끌어당겨서 걷는 것조차 힘에 부치게 만들어버렸다.
어느 햇살 좋은 날, 아버지를 뵈러 갔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아버지가 현관 앞 의자에 앉아 계셨다. 잠깐 걷기 운동을 하고 쉬는 중이라고 하셨다. 어서 오라며 웃으시는 아버지 옆에 늙은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버지만큼이나 나이 든 호랑이는 더 이상 집채만 한 크기도 아니었고 위협적인 존재도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의 오랜 벗이라도 되는 양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너였구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어.” 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호랑이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있다가 이제 왔니?” 감히 쳐다보기도 무서웠던 그 기운은 어디 가고 순하디 순한 눈망울을 굴리고 있는 호랑이는 대답하기도 귀찮은 듯 내게 말했다.
“어디 가긴? 나는 늘 여기 있었는데….”
떠올리기라도 하면 진짜 나타날까 봐 애써 기억에서 지운 호랑이건만, 그 호랑이가 늘 아버지 옆에 있었다니…. 평생을 호랑이와 함께 살아왔다는 것을 아버지는 아실까.
“아버지, 살면서 어깨가 무겁지 않았어요? 집채만 한 호랑이라도 짊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어요?” 아버지께 물었다.
“그런 날들이 있었지. 지나면 가벼워지고…. 그러다가 또 무거워지는 날이 오고, 그런 게 인생이지.”
어머니가 먼저 떠나버리신 지금까지도 아버지 옆에 앉아 있는 호랑이가 아버지 평생의 짐이었는지, 아니면 아버지의 짐을 나누어지고 살아온 동반자였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대문을 나서며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시는 아버지 옆에서 호랑이가 무심히 하품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