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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희 Nov 23. 2023

첫사랑에 눈을 뜨다

 

 나른한 오후였다. 점심 식사 후 환기되지 않은 교실 안에서 누구 하나 여고생다운 활기를 띤 이는 없었다. 책상에 엎드려있는 선희, 멍하니 창밖을 보는 경애, 그저 아무것도 안 하는 내 짝꿍…. 오직 나만이 기계적으로 칠판을 닦으며 당번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모두를 맥없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수학 선생님이었다. 두 시간 연이어 수학 수업을 들어야 하는 그 요일을 우리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나마 수학 수업 후에 이어지는 체육 활동이 우리의 기운을 돋웠는데 그날은 체육 선생님이 출장을 가시는 바람에 자습을 하게 되었다. 그 자습시간을 수학 선생님이 탐을 내셨다. 보강 수업이라는 이름으로 세 시간을 내리닫고 나서야 선생님은 교실 문을 나섰다. 

 수학책을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시는 선생님을 보며 한 친구는 “우리 교회 목사님이 성경책을 꼭 저렇게 들고 다니신다.”며 선생님은 수학책을 신성시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얇은 은테 안경 너머 보이는 선생님의 눈매가 매서워서 우리는 선생님이 진짜 이상한 교주라도 되는 양 수업시간마다 잔뜩 긴장했다. 

 수업 시작과 동시에 선생님은 칠판에 빼곡히 풀이 과정을 적어나가셨다. 교과서의 문제를 하나도 빼는 법이 없었다. 선생님의 열의에 기가 눌린 반 친구들은 서서히 눈이 풀리기 시작했다. 칠판의 왼쪽 맨 위에서 오른쪽 맨 아래까지 쉼 없이 채워지는 무수한 숫자와 문자, 그리고 기호를 맨 정신으로 보고 있던 학생이 우리 반에 몇이나 있었을까. 나도 정신 줄을 꽉 잡으려고 이를 악물었지만 결국 놓쳐버리기 일쑤였다. 

 선생님은 판서로 바쁜 와중에도 눈이 풀린 아이들을 색출해 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잠깐이라도 졸았다가는 선생님의 몽당 분필이 여지없이 날아왔다. 분필에 맞은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 있어야만 했다. 수업시간 내내 교실 안에는 멍한 표정의 아이들이 교대로 앉고 서기를 반복했다.

 점심시간은 반 친구들의 활력을 되찾기엔 너무 짧았다. 분위기가 회복되지 못한 채 5교시 수업 종이 울렸다.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국어 시간이었다. 알퐁스 도데의 <별>을 읽으며 나는 양치기 소년이 되었다. 산 중턱에 앉아 쏟아지는 별을 보며 황홀해하다가, 살며시 내 어깨에 기대는 주인집 아가씨를 느끼고는 숨이 막혔다.

 “당번!”

 내 행복한 상상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들이 당번을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의욕 없는 학생들 사이에서 질문에 답할 아이가 필요하신 것이다. 반 아이 중 절반 이상이 자신의 눈꺼풀과 싸우고 있으니 선생님도 분위기를 바꿀 매개체가 필요하셨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선생님의 질문을 못 들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날 선 목소리로 다시 ‘당번!’을 외치기 전에 일어나야만 했다.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 해주세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평소 나는 절대 수업의 흐름을 끊거나, 끊으려고 시도하는 부류의 학생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는 그 선생님의 첫사랑에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저 위기를 모면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나의 입을 통해 그렇게 나온 것뿐이었다. 

 내 목소리의 다급함이 마치 간절함으로 느껴졌는지 선생님은 다행히 나를 꾸짖지 않으시고 첫사랑에 대한 수줍은 추억을 꺼내주셨다. 안도의 숨을 쉬며 자리에 앉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축 가라앉아 있던 교실의 공기가 둥둥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주위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감은 눈인지 뜬 눈인지 구분도 되지 않던 아이들의 눈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른하고 무기력했던 그날 오후, 우리는 첫사랑에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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